가. 백제악과 백제악사
일본에서 百濟樂(구다라가쿠)이 공식적으로≪日本書紀≫에 기록된 때는 다음에 제시했듯이 欽明天皇 15년(554)이다.
⑬ 欽明天皇 15년 2월 백제는 음악인 施德 三斤·季德 己麻次·계덕 進奴·對德 進陀를 파견했는데, 모두가 대치시켜 달라는 요청에 의거한 것이다(≪日本書紀≫권 19).
백제 본국의 왕립음악기관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악사들은 일정한 기간의 파견근무를 마친 후에 귀국했는데, 흠명천왕 15년의 네 백제악사들도 귀국을 요청했음이 ⑬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일본에 파견됐던 삼근·기마차·진로·진타가 백제의 16관등 중 8관등(施德)·10관등(季德)·11관등(對德)의 관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제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다.646)
일본에 파견된 백제악사 4명은 橫笛·篌·莫目·춤(舞)의 선생이었다. 횡적을 글자의 뜻대로 연주자가 가로 잡고 부는 관악기의 일종임이 분명한데, 이 백제의 횡적은 나중에 百濟笛(구다라부에) 또는 高麗笛(고마부에)이라고 불리었다. 가야금이 신라인에 의해서 연주되므로 新羅琴(시라기고토)이라 불렀듯이, 백제적이라는 명칭도 일본에 파견된 백제악사와 백제악생에 의해서 오래 연주되다보니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제적은 본국의 笛에서 유래되었다.
≪日本後紀≫권 17에 기록된 군후는 일본음악학자에 의해서 공후의 일종으로 추정됐지만,647) 최근에 한국음악학자에 의해서 공후가 아닌 거문고(玄琴)로 밝혀졌다.648) 군후가 백제악사와 백제악생들에 의해서 연주됐기 때문에 百濟琴(구다라고토)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이 백제금의 원형은 무용총의 거문고 원형처럼 생긴 백제향로의 거문고에서 볼 수 있듯이 4현짜리로 생각되고,649) 그것은 본국의 거문고에서 유래되었음이 확실하다.
막목(마쿠모)이 어떤 종류의 악기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막목이 오현·篪·향피리 중의 하나로 추정됐는가 하면, 관악기의 일종으로 추정되기도 했고, 서역지방에 있는 원시형태의 피리 맘(mam)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650) 현재 舞樂(부가쿠)의 무용반주악기로 고려적과 篳篥(히찌리키)가 사용되는 점으로 미루어 막목은 피리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다.651)
백제적의 횡적과 백제금의 군후 그리고 피리의 일종인 막목에 의해서 연주된 음악은 백제악이었을텐데, 그런 백제악을 風俗樂이라 했고, 백제악생들이 춘 춤을 風俗舞라고 기록하였다. 풍속악과 풍속무라고 명명한 이유는 아마도 향토색이 짙은 백제지방의 음악과 무용이기 때문이고, 그런 가무가 궁중잔치에 쓰인 연향악의 일종일 것이라고 추정된 바 있다.652) 아무튼 백제악사와 악생들이 보여준 춤과 음악은 본국의 樂·歌·舞에서 유래됐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음악과 춤 이외에 백제사람 味摩之는 推古天皇 20년(612) 탈춤의 일종인 伎樂(기가쿠)을 중국 吳나라에서 배워 일본에 전해주었다. 미마지가 일본에 귀화하여 櫻井(시구라이)에서 소년들에게 가르쳤을 때 사용한 기악의 仮面이 아직까지 일본의 東大寺(도다이지)에 보존되고 있다. 미마지가 전한 중국의 기악이 우리 나라의 양주산대놀이의 가면극과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백제에도 기악 계통의 탈춤이 소개됐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653)
646) | 李基白,≪韓國史新論≫新修版(一潮閣, 1990), 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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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 | 吉川英史,≪日本音樂の歷史≫(大阪:創元社, 1965), 35쪽. |
648) | 李惠求,≪韓國音樂論叢≫(秀文堂, 1976), 162쪽. |
649) | 백제악기에 대한 상론은≪서울신문≫1994년 1월 28일자<百濟를 다시 본다:5人 奏樂像은≪日本後紀≫기록과 일치>참조. |
650) | 李惠求, 앞의 책(1976), 162쪽. 吉川英史, 앞의 책, 35쪽. |
651) | 宋芳松, 앞의 책(1984), 79쪽. |
652) | 李惠求, 앞의 책(1976), 180∼181쪽. |
653) | 李惠求,<山臺劇과 伎樂>(앞의 책, 1957), 226∼23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