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라악과 고려악
일본 역사서에 의하면 신라악이 최초로 기록된 때가 允恭天皇 42년(453)이다. 다음은≪일본서기≫에 전하는 신라악 관련의 기사이다.
⑭ 신라왕이 천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놀라서 슬퍼하면서 조공으로 배 80척과 여러 음악인 80명을 보냈다. …難波津(나니와)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모두가 소복을 하고서는 모든 공물을 받들고, 또한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벌려 놓았으며, 난파진에서 왕도에 이르기까지 소리내어 울기도 했고, 혹은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으며, 마침내는 빈궁에 참배했다(≪日本書紀≫권 13, 允恭天皇 42년 춘정월 을해삭 무자).
위의 ⑭에서 언급된 음악인 80명 및 여러 악기는 과장된 상징적 숫자나 악기수로 보아야 옳을 듯싶다. 왜냐하면 윤공천황 42년(453)이 눌지왕 37년이고 가야금이 신라사회에 수용되기 1세기 전이고, 이즈음에는 향토색 짙은 지방의 가무가 신라음악사의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위문사절단과 함께 보낸 신라악기는 아마도 가무에서 반주악기로 사용되던 북 종류의 타악기와 뿔피리(角) 정도의 관악기였으리라고 추정된다.
欽明天皇 22년(561)에 신라사신이 머물던 新羅館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그곳에서 신라악이 연주됐으리라 추정됐지만,654) 신라악이 최초로 언급된 때는 天武天皇 12년(684)의 기록 “고려·백제·신라 삼국악이 궁전 뜰 가운데 있었다”655)라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천무천황 12년은 삼국통일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신라악은 고려악 및 백제악과 더불어 三國樂의 하나로 일본궁중에서 연주되었고, 가야금이 신라의 대표적인 악기였다. 그러나 신라악사와 신라악생들이 연주한 악곡이 어떤 종류의 음악인지는 알 수 없다.
일본을 방문하던 고구려의 사신이 머물던 영빈관이 相樂館이었는데, 일본천황이 상락관에서 고구려사신을 위해서 베푼 잔치에서 고려악이 연주되는 것이 상례였다. 고구려사신의 영빈관이었던 상락관이 흠명천황 31년(570)에 건립됐으므로, 고려악은 늦어도 흠명천황 31년부터 연주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656) 그러나 고려악이 최초로 언급된 기록은≪일본서기≫권 19에서 발견되지만, 고려악사와 고려악생들이 무슨 악기로 어떤 악곡을 연주했는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宋芳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