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녹봉제의 운영 및 재원
가) 출관과 반록
문종 30년(1076)에 녹제가 정비된 이후 12년이 지난 선종 5년(1088)에 出官과 差出의 조건에 의한 頒祿法이 제정되었다. 매년 3월 전에 차출되어 6월 전에 임관하면 전 녹봉을 지급하고, 6월 후에 임관하면 반액을 지급하고, 3월 후 6월 전에 차출되어 10월 전에 임관하면 半祿을 지급하고, 10월 후에 임관하면 그해에는 녹봉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0276) 즉 차출과 임관의 달 수가 녹봉 지급의 기준이 된 셈인데 이와 같은 차출과 임관의 조건을 고려시대 연 2 회 頒祿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반록시기는 정월 7일과 7월 7일 연2회 初2番 정기반록일이 있었다.0277) 전기에 지급하는 것을 初番祿이라 하고 후기에 지급된 것은 封倉祿이라 하였다. 이러한 연 2회의 정기 반록 외에 月奉이 지급된 예도 있었다.
나) 녹 패
녹패는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증서로서 정월 7일에 백관에게 하사되었다.0278) 人日 즉 정월 7일에 하사하였기 때문에 人勝祿牌라고도0279) 하였으며, 또한 녹패는 매매되기도 하였다.
다) 녹봉의 품목
녹봉으로 지급되는 중심 품목은 米·粟·麥이었다.0280) 그러나 米·粟·麥 등 곡류만이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예종 10년(1115)에 三司에서 개정한 祿折計法0281)에는 大絹·絲緜·小絹·小平布·大綾·中絹·緜紬·常平紋羅·大紋羅 등의 絹·布·綾·羅가 미곡과 換算되어 지급되기도 하였다. 그 折價의 기준이 미곡이었던 만큼 녹봉의 중심되는 품목은 미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송대에 화폐가 녹봉으로 지급되었고, 조선시대에는 楮貨를 지급한 예가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화폐를 지급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화폐가 널리 유통되지 못한 사회의 반영이라 하겠다.
라) 녹봉의 재원과 관장
녹제가 일단 정비되는 문종 당시 녹봉으로 지출해야 할 총액은, 중앙관록을 취급하는 左倉의 세입이 139,736석 13두, 서경관록을 취급하는 서경 大倉의 세입이 17,722석 13두로서 도합 약 16만석이었다. 그런데 외관록의 경우는 좌창과 外邑에서 각각 반씩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어,0282) 실제로 외관을 포함한 모든 관리들에게 지출해야 할 총액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아야 했던 것이다. 즉 양계와 서경 관내 및 半給하는 외관록을 제외한 139,736석 13두가 개경의 좌창에 세입되어 내외관의 녹봉으로 충당된 셈이다.
양계와 서경 관내에서는 녹봉에 충당할 地祿으로 吏民地祿0283)과 龍岡·咸從·成州 등에 ‘祿位餘田’0284)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交州道·忠淸道·全羅道 등 여러 州와 각 도의 ‘祿轉’0285) ‘轉米稅租’0286)는 祿轉車·祿轉船0287)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중앙의 廣興倉(左倉)으로 수송되었다. 이렇게 전국 각처에서 녹전이 소출되고 있는 지록은 民田이었으며, 민전의 租는 개경의 좌창에 수송되어 녹봉에 충당되기도 하고 右倉(豊儲倉)·大倉에 수납되어 國用에 충당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재정운영 방식은 전국에서 수취되는 田租를 일괄적으로 국고에 수납해서 그것을 다시 재정 용도별로 각 기관에 분할해서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전초가 소출되는 토지를 국가재정의 각 항목에 맞추어 구분하고, 토지 그 자체를 각종 재정의 항목에 따라 분할해서 재원을 미리 분배 고정시켜 놓았다.0288) 이러한 재정운영의 원칙에 따라서 전국의 토지는 각기 그 독자의 재정용도를 갖게 되었다. 供上 즉 御需를 위해서 內莊宅 소속의 광대한 御料地가 준비되어 왕실의 재정을 맡았다. 祭祀·賓客 등에 소용되는 재정비용 즉 국용은 주로 우창(풍저창)과 대창에서 관장했다. 軍需 즉 군사비를 부담하는 재원에는 軍人田이 있었다.
녹봉의 재원이 되는 것은 민전이었으며,0289) 민전의 租(地稅)는 개경의 좌창에 수송되어 녹봉에 충당하거나, 우창과 대창에 수납되어 국용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民田租로서 좌창에 세입되어 녹봉에 충당되는 것을 국용에 충당되는 것과 구별하여 녹전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전국 토지의 총면적에서 녹봉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었을까. 공양왕 즉위년 12월에 趙浚이 올린 상소에 전국의 토지 50만 결 가운데 국용을 위한 10만 결을 우창에 소속시키고, 供上을 위한 3만 결을 四庫에, 녹봉의 재원으로 10만 결을 좌창에 소속시키고, 朝士들에게 지급해야 할 토지를 畿田(祿科田) 10만 결로 計上하고 있다.0290) 여기서 기전 10만 결이라 한 것은 조사 즉 관료들에게 지급해야 할 녹과전을 지칭한 것으로서 국용 및 녹봉의 재원으로 계상하고 있는 각 10만 결과 같은 비율로 책정하고 있다. 즉 녹과전과 녹봉의 재원이 되는 토지 10만 결은 전국 토지의 5분의 1에 상당한다. 녹봉의 재원이 되는 10만 결에 대한 생산고는 성종 11년 判에 의거하여 水田과 旱田을 합한 상·중·하등전의 1결당 평균 생산고 8석으로 계산하면0291) 80만석이 된다. 그 생산고 80만석에 대한 조세액은 민전조 4분의 1세율을 적용하면 20만석이 되어 이것은 문종 당시 녹봉의 재원으로 책정한 16만석을 충분히 충당할 수 있는 액수이다. 그러나 민전조율 10분의 1을 적용하면 8만석이 되어 16만석으로 책정한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이렇게 되면 민전조율이 10분의 1이 아니라 4분의 1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 남겨 둔다.0292)
외관록의 경우 문종 당시에 반은 좌창에서, 반은 외읍에서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숙종 6년(1101) 2월에 그 재원이 외읍으로 완전히 이관되어 외관록은 외읍의 公須租에서 모두 충당하도록 되었다.0293) 公須租는 외읍의 公須田에서 거두는 조를 말하며, 공수전은 紙田·長田 등과 같이 公廨田에 속하는 것으로 소속 지방관청의 비용을 위한 것이다. 외관의 녹봉은 숙종 6년 이후부터는 지방의 공수전에서 소출되는 공수조로서 충당하였다. 결국 외읍의 공수전이 외관록의 재원이 된 것이다.
서경관록의 경우는 서경관을 위한 녹봉의 재원으로 서해도 稅粮 17,722석 13두가 마련되어 있었다.0294) 그 관장은 서경 大倉의 소관이었다. 여기서 서해도 세량은 서해도 관내의 ‘祿位餘田’ 또는 ‘轉米稅租’ 즉 民田租(地稅)에서 歲收되는 祿轉米를 말한다.
마) 녹봉제의 운영
고려 녹봉제는 중앙집권적인 체제확립을 위한 여러 시책 가운데 전시과와 더불어 관리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준 제도였다. 그러나 그 운영면에서는 전시과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전시과는 국가가 科田 소유자에게 收租權을 인정하되 국가권력이 개입된 공적인 색채가 강한 것이라면, 녹봉은 국고(廣興倉)에서 일괄 수납하여 지급하는 완전 공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시과는 田主가 경작자로부터 직접 租를 받지 못하고 국가에서 받아 주어 地主와 佃戶 사이에 지방관을 통한 간접 지배밖에 못하게 함으로써 지주제 토지경영을 방지한 것이다. 전시과의 운영이 지주와 전호 사이에 국가권력이 개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녹봉제의 운영 방법과 같이 완전히 공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공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수조권의 사유라는 사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科田을 공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0295) 사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0296) 만약에 전시과의 운영방법이 녹제운영과 같은 것이었다면 그것은 녹봉제이지 토지제도가 아니며, 새로이 녹봉제를 더 설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는 토지와 녹봉을 이원적으로 지급하여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주었다.
고려시대 관료들은 대체적으로 경제적 기반의 절반 정도는 전시과 田租의 수입에 의존하고, 절반은 녹봉에서 충당하도록 짜여져 있다. 앞서 공양왕 즉위년에 趙浚이 올린 상소에서 녹봉의 재원으로 10만결을 책정하고, 朝士 즉 관료들에게 지급해야 할 畿田의 녹과전도 10만결로 책정하여 녹봉과 田租 수입의 재원이 되는 토지의 면적은 같은 비율이었다. 고려 녹봉제가 정비되는 문종 30년 당시에 전시과는 18과를, 녹봉제는 문무반록의 경우 47과를 이루어, 대체로 전시과와 녹봉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절반 정도로 보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전시과의 1科田 100결(중서령·상서령·문하시중)은 성종 11년 判에 의거하여 水田과 旱田을 합한 상·중·하등전의 1결당 생산고의 평균치 8석을 기준으로 私田租率 2분의 1을 적용하면, 전시과 1과의 수입은 400석이 되어 문무반록 1과 400석(중서령·상서령·문하시중)과 완전 일치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결당 생산고 8석을 기준으로 전시과 18과 전체에 적용시켜 보면 대체적으로 1과에서 11과(45결 180석, 녹봉 11과 180석)까지는 科田에서의 수입과 녹봉 수입이 거의 비슷하게 되고, 11과 이하는 비교가 어렵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과전에서의 수입과 녹봉 수입의 비율은 반 정도였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0276)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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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7) | 李熙德, 앞의 글, 186∼187쪽. 崔貞煥, 앞의 책, 61∼63쪽. |
0278) | ≪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3년 춘정월. |
0279) | ≪高麗史≫권 67, 志 21, 禮 9, 人日賀儀. |
0280)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
0281) | 위와 같음. |
0282)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序文. |
0283)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
0284)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西京官祿. |
0285) | ≪高麗史節要≫권 21, 충렬왕 17년 정월·18년 3월. |
0286)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西京官祿. |
0287) | ≪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및 권 29, 공민왕 23년 4월. 祿轉을 수송하는 교통수단으로 祿轉車·祿轉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0288) | 姜晋哲, 앞의 글(1975), 179쪽. |
0289) | 姜晋哲,<高麗時代의 土地制度>(≪韓國文化史大系≫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5), 1295∼1298쪽. ―――,<高麗前期의 公田·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歷史學報≫29, 1965), 30∼31쪽. ―――, 앞의 글(1975), 168∼190쪽. ―――,<公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고려대출판부, 1980), 178쪽. |
0290)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
0291)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성종 11년 判에 의거하여 姜晋哲,<公田·私田 差率收租의 문제>(앞의 책, 1980), 394쪽에서 계산한 水田과 旱田을 합한 上·中·下等田의 1결당 평균 생산고는 약 8석이 된다. |
0292) | 참고로≪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趙浚 上書의 ‘什一稅法’에 의거하여 田 1負에 3升씩을 수취했다면 1결의 田租額은 300升(30斗) 즉 2石(15두 1석)이 되고, 1결의 생산고는 20석이 된다. 1결당 생산고 20석에 녹봉의 재원으로 책정한 10만결을 곱하면 200만석이 되고, 민전의 조율 10분 1을 적용하면 20만석이 된다. 이것도 문종 당시 녹봉의 재원으로 책정한 16만석을 충분히 충당할 수 있는 액수이다. 그러나 이 경우 생산고 20석은 당시 생산 수준으로 도저히 산정할 수 없는 액수이다. 성종 11년 判에 의거한 당시 水田의 경우 상등전 1결당 생산고는 15석∼13석이고, 하등전의 경우는 7석∼10석 밖에 되지 않는다. 水田과 旱田을 합한 상·중·하등전의 1결당 평균 생산고는 약 8석이 된다. |
0293)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外官祿. |
0294)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序文. |
0295) | 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
0296) | 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앞의 책, 1980) 및 앞의 글(19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