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 후기의 결부제
이상에서 고려 전기의 量田式이 ‘方三十三步爲一結’이었으며 1보는 6척이었고, 실제 측량에는 1보를 10등분한 분이란 단위를 사용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결부제의 내용이 고려 전기와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고려 전기의 양전식은 신라의 그것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또는 말에 이르러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양전방식이 도입되었다. 바로 田品에 따른 隨等異尺制의 도입이 그것이다.
≪龍飛御天歌≫와≪世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0932) 고려 후기 또는 말에 이르러서는 전품의 구분이 생겨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되었으며, 각각의 전품에 따른 양전척의 길이가 동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3등급의 수등이척제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언제부터 이러한 제도가 채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20指·25指 30指를 기준으로 하는 指尺의 길이에 대하여는 이를 周尺과 대비한 자료가 있으므로, 각 등급의 지척의 길이를 각각 上等田=38.71㎝, 中等田=48.49㎝, 下等田=58.27㎝로 보고 각 等級田의 1결의 실제 면적이 상등전=1998.9평, 중등전=3136.5평, 하등전=4529.2평으로 본 견해는 대략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된다.0933)
그러나 전품이 구분되고 각 등급전에 따른 양전척의 길이가 세 종류로 나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기본적인 양전식이 전 시대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世宗實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면적 44척 1촌 즉 44.1평방척을 1속으로 하고 이의 10배를 1부 그리고 1부의 100배를 1결로 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실면적 44척 1촌 즉 44.1평방척이란 1결을 ‘方三十五步’로 하였을 때 이를 척으로 환산하면 210척(35×6)이 되고, 이를 제곱한44,100평방척(210×210)의 정확하게 1,000분의 1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의 1부의 면적은 곧 ‘사방 3보 3척’으로 441평방척이었으며 이는 바로 ‘방 33보위 1결’에서 나온 것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즉 고려 후기 및 세종 26년 이전의 조선 초의 양전식은 ‘방 33보위 1결’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나, 다만 양전척의 길이가 분화되어 바뀌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단일 면적의 결부제가 전품에 따라 면적을 달리하는 수등이척제로 바뀐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문종 23년(1069),0934) 고종 19∼46년(1232∼59),0935) 충숙왕 원년(1314)0936)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들 견해 중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대략 고려 후기의 어느 시기에 전품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그 이전의 단일 척도에 의한 결부제는 점차적으로 수등이척에 의한 3등급의 결부제로 대체되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지척을 양전의 기준이 되는 양전척으로 채용하게 된 이유는 당시 度量衡制의 문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 후기는 元의 간섭을 받은 시기로 원나라의 여러 제도가 도입되어 우리 나라의 제도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고, 정치적으로도 중앙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시기였다. 도량형제에 있어서도 量制의 급격한 변화가 이 시기에 있었으므로0937) 양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양전제에도 어떠한 종류의 변화가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양제의 대량화에 따라 결부의 면적도 점차 확대되어 나갔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조세 부담자인 농민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며, 대토지 소유자인 권문세족들도 자신의 소유지를 장부상으로 줄임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통제력의 약화는 당연히 관습적이고 실용적인 척도를 量田尺으로 채택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지척이란 매우 모호한 것이기는 하나 동시에 매우 실용적이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었기 때문에 점차 일반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수등이척제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단일 척도에 의한 이전 시기의 결부제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앞서 신라 결부제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언급한 바와 같이 결부가 단지 전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산림·대지·염전 등 거의 모든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인데, 위에 언급한 지척에 의한 3등급의 결부제가 적용된 것은 단지 전답에 한한 것이고 이 이외의 토지에 대해서는 그 이전의 단일 척도에 의한 결부제가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일 척도에 의한, 전지 이외의 토지를 측량하는 데 사용된 결부제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 세종 7년(1425)에 편찬된≪慶尙道地理志≫가 있다.≪경상도지리지≫에는≪世宗實錄地理志≫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바로 산성·읍성조에 성의 둘레인 周廻를 步·尺으로 표시하고, 이어 그 내부 면적을 결부로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夫山城은…둘레는 2,765보 3척이고 내부 면적은 688결 33부이다”와 같은데 여기에서 둘레(周廻)와 내부 면적(內廣)의 기록은 당시의 결부제의 내용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경상도지리지≫의 산성·읍성조에 기재된 내부 면적의 결부는 절대 면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신라의 결부제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 고려시대에도 전시과의 柴地의 면적을 나타내는 데 쓰인 결부와도 그 내용이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에서 만들어진 절대 면적을 나타내는 결부제는 고려의 어느 시기에 수등이척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해≪경상도지리지≫의 산성·읍성조에 보이는 것처럼 경지 이외의 면적을 측정하는 단위로서 기능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1결은 ‘方 33步’가 된다는 원칙에는 변동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을 요약하면 고려 후기에는 전품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전품에 따른 3등급의 수등이척제가 사용되었으나, 이는 기준 척도의 변화일 뿐 ‘방 33보위 1결’의 원칙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려 후기의 어느 시기부터는「方 33步」가 아니라「方 35步」가 1결이 되었는데 이는 결에 대한 양전식이 바뀐 것이 아니라 1결의 1/100인 1부의 면적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가 고착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들어와 경지면적에 대한 측량이 보다 엄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문종 23년에 개정된 步의 아래에 分이라는 단위를 두는 양전식이 별로 적용되지 못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경작지의 측량에 쓰인 양전척은 점차 커지는 경향을 띠어 지척을 기준으로 하는 3등급의 양전제가 관행화되었고, 당시의 대부분의 전지가 하등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0938) 이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거의 4배 정도로 확대된 것이다.0939) 그러나 경지 이외의 지역의 경우에는 여전히 단일 척도에 의한 ‘방 33보위 1결’의 제도가 지켜지고 있었으며 기준척도의 길이도 지척이 아니라 通用尺이었음을≪경상도지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