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집현전
集賢殿은 세종 2년(1420)에 인재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을 위하여 당·송대의 집현전제와 고려대의 館閣制를 참작하여 궐내의 학문연구 기관을 통합하면서 성립되었고,076) 세조 2년(1456)에 세조가 사육신사건을 계기로 하여 혁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관이 관장한 일은 법제적으로는 도서의 수장과 이용, 학문활동,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등 학문적인 기능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세종 초·중기에는 법제적인 기능이 중심이 되었고, 세종 후기 이후에는 법제적인 기능은 물론 국가시책 논의의 참여, 간쟁과 탄핵 등의 기능도 행사하였다. 관원은 성립될 때에는 겸관인 영전사(정1, 2)·대제학(정2, 2)·제학(종2, 2)과 전임관인 부제학(정3, 1)·직제학(종3, 1)·직전(정4, 1)·응교(종4, 1)·교리(정5, 1)·부교리 (종5, 1)·수찬(정6, 1)·부수찬(종6, 1)·박사(정7, 1)·저작(정8, 1)·정자(정9, 1)가 있었다. 이 관원의 직질은 변동이 없었으나 인원은 몇 차례 변천되면서 운영되었으니, 겸관은 세종 4년에 각 1 명이 감소되면서 폐지될 때까지 계승되었다. 전임관은 교리 이하나 직제학 이하가 증감되면서 세종 8년 16인, 세종 17년 초 22인, 세종 17년 7월 32인이 되더니, 세종 18년에 부제학(1)·직제학(1)·직전(2)·응교(2)·교리(2)·부교리(2)·수찬(3)·부수찬(2)·박사(2)·저작(1)·정자(2)의 20인으로 고정되었다.
겸관인 제학 이상은 관아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다만 부제학 이하를 擬望하고, 부제학 이하가 언론활동상 국왕과 대립하였을 때에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제학 이하는 제반 업무를 담당하였고, 경연관과 서연관을 例兼하면서077) 경연과 서연을 전담하였다. 겸관·전임관 모두 일류 학자가 제수되었다. 부제학 이하에 결원이 생기면 차하위자가 차례차례로 승진되었고, 대개 부제학까지 승진한 후에 6조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였다.078) 집현전이 중심이 된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 유교윤리, 의례, 음운 등 분야의 서적편찬은 조선 초기 문치 융성의 토대가 되었다.
076) | 명칭상으로는 정종 원년(1399)에 고려의 집현전제를 참작하여 校理(문신 5품 이하 겸)와 說書·正字(문신 7품 이하 겸)를 두어 경적을 강론하고 고문에 대비하게 하면서 성립되었고, 다음해에 寶文閣으로 개칭되며 폐지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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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 그 관원수와 관련되어 세종 2년에는 11인 모두가 경연관을, 세종 17년에는 32인 중 22인은 경연관에 나머지 10인은 서연관을 겸하였으나, 세종 20년에는 20인 중 10인은 경연관을 겸하고, 10인은 서연관을 겸대하였다. |
078) | 崔承熙,<集賢殿硏究(상)·(하)>(≪歷史學報≫32·33, 1967·1968)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