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귀족 숙위군
조선 초기의 귀족 숙위군에는 족친위·공신적장·충의위·충찬위·충순위등이 있었다. 족친위는 왕실의 내·외 족친이 입속하는 장번 무관의 병종으로서 정확히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이나 선왕의 袒免 以上親, 왕비·선후의 緦麻以上親, 세자빈의 期年親에 해당하는 왕실의 내·외 족친의 적자·첩자가 입속할 수 있었다. 족친위는 왕실의 족친을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기관이었기 때문에 시취도 없고 종5품까지의 체아직을 받았으며 만기가 차도 더 근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3품까지 품계만 올라 갈 수 있었다.
공신적장은 공신의 적자와 적손이 입속하는 병종으로 정원없이 모두 체아 직을 받았다. 입속하는 공신적장의 수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아직 에는 有仕遞兒職과 無仕遞兒職이 있었는데 유사체아직은 국가를 위하여 일정한 업무에 종사해야 하는 체아직이고 무사체아직은 그러한 복무규정이 없이 특정한 사람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체아직이었다. 공신적장은 그 중 무사체아직에 해당하였다. 공신의 아들 중에는 재능이 있어서 과거 시험이나 문음 취재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을 받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그러한 재능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공신적장은 이러한 공신의 적장자에게 주는 무사체아직이었다. 공신은 이미 양반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므로 공신적장은 양반귀족 숙위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태종 17년(1417)부터 開國功臣·定社功臣·佐命功臣의 3공신 적장·적손에게만 공신적장에 입속하게 하였고 그 다음해인 세종 즉위년(1418)에 충의위가 설치되어 3공신의 衆子·衆孫이 입속하게 하였다. 공신적장과 충의위는 처음에 3공신의 아들·손자 만을 대상으로 하던 것을 세조조 이후에는 靖難功臣 등 신생공신의 아들·손자도 대상에 포함하게 되었다. 공신적장은 장번으로 종3품까지 이르는 141개의 체아직이 있었으며 만기가 찬 뒤에도 더 근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3품까지 품계만 올려 주었다.
충의위는 세종 즉위년 11월에 개국·정사·좌명 등 3공신의 중자·중손을 입속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귀족 숙위군이었다. 이들 중 유능한 사람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하여 관직을 차지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충의위의 군직체아나마 받아 그 체아록을 받다가 기회를 보아 다른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충의위는 공신적장과 마찬가지로 공신에 대한 報功의 의미로 설치된 병종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18세 이상이면 무시험으로 들어가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었고, 자원에 따라 더 이상 근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막연히 정한 공신자손의 충의위 입속규정은 그 적용과정 에서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공신 첩자손의 충의위 입속 이 문제되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세종 12년 2월에는 왕과 조신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세종은 공신의 적처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비록 賤妾子라도 충의위에 입속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조신들은 그렇게 되면 족속이 서로 섞여 존비가 문란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반대하였다. 공신의 입장에서 보면 천첩자도 같은 혈육이니 충의위에 입속시켜도 좋겠지만 신분상으로 볼 때 양천이 뒤섞이게 되므로 양반관료들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162) 이러한 논란 끝에 공신 적실에서 아들이 없으면 良妾子, 양첩자도 없으면 賤妾子 承重者가 충의위에 입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양반관 료의 반발이 심하여 충의위의 입속자격을 공신의 양첩자에 제한하고 양첩자 라 하더라도 工商女·姿女·補充軍女·驛女의 소생은 그때그때 심사하여 입 속 여부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는 충의위의 입속자격을 양첩자손뿐 아니라 첩자손 승중자도 포함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 이 첩자, 특히 천첩자의 충의위 입속을 제한한 것은 양반 신분의 자기도태 과정의 하나인 庶孼差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의위는 공신적장과는 달리 유사체아직이었으므로 일정한 시위근무를 하 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충의위는 공신에 대한 보공을 위하여 설치된 병종이 었으므로 갑사·별시위처럼 도성 안팎의 行巡이나 講武·大閱·門外行幸 때 의 隨陣驅獸와 같은 군무는 맡지 않았고 국왕측근에서 시립·호종하는 영예 로운 시위업무에만 종사하였다.163) 뿐만 아니라 충의위에 소속된 공신자손들은 공공연히 다른 관직을 겸직하고 있었고 국가에서도 이들을 규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入直·隨駕 등 충의위 본연의 임무조차 면제해 주었다.164) 그리고 충의위·충찬위·충순위에 입속한 생원·진사들은 圖點 300중에서 100∼150만 따면 문과 초시인 館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충의위는 공신자손이라는 여건 때문에 여러 가지 특전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충의위에서 資級을 높인 다음 과거시험에 급제하면 직품을 껑충 올려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문과를 준비하는 성균관의 생원·진사 들이 충의위·충찬위·충순위로 몰려들기도 하였다. 충의위는 장번으로 종4품이 한품이었고 53개의 체아직이 있었으며 만기가 되어도 더 근무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3품까지 품계만 올려 주었다.
충찬위는 원종공신 자신이나 그 아들·손자, 또는 첩자손 승중자가 입속 할 수 있는 병종이었다. 단 원종공신의 첩자손·승중자의 충찬위 입속 여부 의 문제는 충의위와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당국의 심사를 거치게 되어 있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찬위는 언제 설치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충의위와 비슷한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충의위는 시위·호종에만 종사하고 수진과 같은 힘든 군무에는 동원되지 않았는데 비하여 충찬위는 내금위·별시위·갑사와 마찬가지로 수진에 참여하여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찬위·충순위는 給保가 없고 체아직도 20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간혹 保人이 있는 일반 양인으로 옮겨 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충찬위에 대한 특전이 보잘것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충찬위는 도성 안팎의 巡綽·군사훈련·山行·捉虎 등 어려운 군무에 동원되지 않 았으며 충의위의 예에 따라 9일마다 돌아가면서 입번하게 되어 있었다. 그 리고 충의위·충순위와 마찬가지로 下番日에 성균관에 들어가 원점 100∼150만 따면 문과 초시인 관시에 응시할 수 있었고 만기가 차면 수령·수문장·참봉 등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충찬위의 한품은 종3품이었으며 더 근무하기를 원하는 자는 정3품까지 관품만 올려 받을 수 있었다.
충순위는 세종 27년(1445) 7월에 3품 이상의 고급관료의 자손을 위하여 설치한 귀족 숙위군이었다. 충순위에 입속할 수 있는 자격은 2품 이상의 아 들·손자·사위·동생·조카, 실직 3품관의 아들·손자, 대간 및 이·병조의 관직을 역임한 관료의 아들에 한하였다. 충순위의 정액은 600인으로(뒤에는 무정수), 4번으로 나누언 50인씩 교대근무하게 되어 있었으며 형식적으로나 마 자원자에 한하여 시험을 거쳐 취재하게 되어 있었다. 고급관료의 자손이 라 해서 모두 재능이 있어서 과거시험이나 취재시험을 거쳐 관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무능한 자도 있을 수 있었다. 충순위는 이러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된 양반 특수군이었다.
그러나 충순위는 세조의 왕권강화책과 군액확장책의 일환으로 세조 5년 (1459) 8월에 일시 혁파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양반관료의 자손들도 일반 양 인의 正兵에 편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반관료의 반발에 부딪혀 예종 원년(1469) 정월에 勵精衛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되어 동반 6품 이상, 서반 4품 이상의 아들과 문·무과출신, 생원·진사, 유음자손이 입속하게 하였다. 여정위는 설치된 직후에 다시 충순위로 개칭되었다. 충순위의 입속 범위는 그 후 더 확대되어 왕 또는 선왕의 異姓緦麻 外6寸 以上親, 왕비 또는 先后의 시마 외 5촌 이상친, 동반 6품 이상, 서반 4품 이상, 현관 역임자, 문·무관출신, 생원·진사, 有蔭子·孫·壻·弟·姪로 규정되었다.165) 즉 충순위는 족친위에서 제외된 왕실의 족친과 충의위·충찬위에 소속될 자격이 없는 양반자손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충순위는 그 처우가 정병과 비슷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두 병종이 다 번상병이었고 체아직을 받지 못한 점에서 그러하다. 다만 다른 점은 충순위 가 참상관 이상이나 과거합격자 및 유음자손이 입속하는 양반 병종이었는데 비하여 정병은 참하관 이하의 양반이나 일반 양인이 입속하는 일반 병종이었다는 점이다. 같은 양반이면서도 관직의 높고 낮음과 부조의 음덕에 따라 특수 병종인 충순위에 소속될 수도 있었고, 일반 병종인 정병에 소속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충순위는 助丁을 받지 못하였으나 정병은 조정을 받고 있었 다. 이에 충찬위·충순위에 소속될 사람이 조정을 탐내어 정병에 입속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충순위는 정병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특전을 부여받고 있었다. 충순위는 파수·巡綽 등 어려운 군무에 동원되지 않았으며 9일은 집에 있고 3일만 입번하게 되어 있었다. 충순위도 出番日에 성균관에서 원점 100∼150만 따면 문과 초시에 응시할 수도 있었고 만기가 되면 수문장·수 령 등의 관직에 임명될 수도 있었다. 충순위는 정원이 없고 한품은 종3품,만기가 되어도 더 근무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 3품까지 품계만 올려 받았다.충순위에는 체아직이 없는 대신 근무일이 많고 적음에 따라 녹을 주게 되어 있었다.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