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무격에 의한 기우와 도교적 기우
무당과 판수를 불러 모아놓고 지내는 기우제는 조선초에 가장 널리 이용된 방법의 하나였다. 조선초에는 國巫堂이란 기구까지 있어서 이것이 기우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 방식 또한 시련을 받기 마련이었다. 성종 13년(1482)에 ‘聚巫禱雨’를 없애라는 요구가 일어난 것은 그런 예의 하나였다. 그리고 실제로 성종대 이후에는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는 무당에 의한 기우제는 사라져 가고 있었으나 민간에서 시행하는 무당의 기우제는 20세기초까지도 상당히 널리 시행되었다.
고려 때부터의 도교적 영향도 역시 조선 초기에는 상당히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무술적 전통과 도교적 전통을 함께 보여주는 대표적 기우제 사건으로는 태조대에 활약한 文可學의 경우를 들 수가 있다. 태종 2년(1402) 비 올 것을 미리 예보하여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은 문가학은 그 후 4년 동안은 어느 정도 효과있는 기우 전문가로 활동하였는데, 태종 6년 11월에는 요망한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고 그의 추종자 여러 명과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는 진주 사람으로 太一 산법을 배워 비가 올 것을 미리 알 수 있었고, 그 재주가 임금의 인정을 받아 書雲觀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게 되자 좌천되어 개성에서 근무하다가 무리를 이끌어 大事를 꾀하려 했다고 한다.007)
문가학은 도교뿐 아니라 불교 경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의 추종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비가 오는 이치를 불교와 도교 모두를 인용하면서 설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교의 공식 기관으로 조선초에는 아직 昭格署가 있었고, 이 기관에서는 가뭄 때 기우를 위한 醮祭가 행해졌다. 중종 13년(1518) 趙光祖의 극렬한 배격운동으로 소격서는 일단 폐지되었다가 그 후 다시 복구되었지만 기우초는 그 후에는 그리 중요한 몫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007) | ≪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신미·12월 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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