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온천욕
온천욕을 질병 치료에 응용했다는 기록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보인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온천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조선의 건국 직후 세종 때까지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태조는 동왕 원년(1392)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가벼운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平山溫泉(황해도 평산군)에 행차한 적이 있으며, 정종 또한 평산온천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도 늘 풍질로 인한 오른쪽 신장의 통증과 手指屈伸을 고치기 위하여 즉위 후 계속해서 평산온천, 溫水縣온천에 다녔다.
온천에 대해 가장 활발한 운영과 체계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세종 때이다. 세종 9년 예조가 최초로 체계적인 온천 관리법인「中外溫井病人救療事宜」를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온정 수리와 병인 구료를 전담하는 사람을 마련할 것.
② 병인들이 모여드는 정도를 보아 쌀과 콩을 공급하되 병인들을 구료하는 寶를 설치할 것.
③ 병인들이 묵는 숙소의 수리와 식기 등은 관에서 공급하여 갖추게 하고, 병인구료는 보의 쌀로 충당하도록 하며 그 규모는 200석을 넘지 말도 록 할 것. 수령들은 불시로 온정의 관리를 살펴볼 것.
세종 때에는 이같은 제도에 따라 온천 소재지에 구료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어 온천 치료 요법이 훨씬 더 권장되었다. 온천의 관리법뿐만 아니라 온천의 확충과 시험 또한 세종 때 들어 더욱 본격화되었다. 온천의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서 세종은 경기 가까운 곳에 있는 온천을 발견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도록 하였다. 특히 매우 효과 있는 온천을 발견하여 보고한 자에 대해서는 관직에 있는 자는 무조건 세 등급의 벼슬을 올려 주고, 관직이 없는 자는 7품직을 상으로 주며, 향리는 役을 면해주고 8품직을 상으로 주도록 하였다.
주로 자신의 눈병과 다리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지만, 세종은 새로운 온천의 개발뿐만 아니라 온천의 효력을 시험토록 하였다. 세종 23년(1441) 정월에 典醫監正 裵尙文을 평산에 파송하여 평산온천이 눈병에 효력이 있는가를 시험토록 하였으며, 곧이어 大護軍 楊弘遂 등을 온수온천에, 成均博士 鄭白英을 다시 평산에 보내어 눈병의 효험 여부를 시험토록 하였다.
조선 초기에 들어 활발하게 논의된 온천은≪世宗實錄地理志≫와≪東國輿地勝覽≫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실려 있다. 그것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충청도에는 儒城 등 4곳, 경상도에는 東萊 등 3곳, 황해도에는 平山 등 6곳, 강원도에는 伊川 등 4곳, 평안도에는 成川 등 5곳, 함길도에는 鏡城 등 5곳으로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