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퇴율절충론
앞에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학자의 성리설을 이기성 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속하면서도 그 성리설이나 관심 분야가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성리설이나 사단칠정론이 공통점이 있어서 하나의 학파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주자학의 양대 조류인 퇴계와 율곡의 설을 절충하고 있거나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에 퇴율절출파라는 이름으로 묶어 그들의 유학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퇴계학파에서 절충파로 거론할 만한 학자를 들어보면 旅軒 張顯光(1554∼1637)과 眉叟 許穆(1595∼1682)을 들 수 있으나 이들의 사상체계는 절충적이라기 보다 독창적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율곡학파의 경우에는 율곡의 교우였던 우계 성혼의 성리학이 퇴계와 율곡의 대립적인 면을 절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우계와 관계있는 소론계 학자중에 절충적인 입장을 취한 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대표적인 절충론자는 南溪 朴世采(1631∼1695), 拙修齋 趙聖期(1638∼1689), 農巖 金昌協(1651∼1708), 三淵 金昌翕(1653∼1722), 滄溪 林泳(1649∼1696) 등을 들 수 있다. 퇴계학파의 여헌과 미수의 사상은 기호남인계의 학자들로 이어지고 있고 율곡학파의 절충론은 조선말의 華西 李恒老, 省齋 柳重敎, 重庵 金平黙, 勉庵 崔益鉉 등의 주리론적 성리학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이들의 사상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여헌과 미수는 당시로서는 독특하게 이기심성론이 아닌 우주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유학자이다. 특히 여헌의 이기설은 독창적인 면이 많아 성리학의 우주론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성리에 관한 견해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은<理氣經緯說>인데 갈암은 여헌의 경위설이 퇴계의 이기설과 다름을 알고 “경과 위로써 이와 기를 설명하는 것은 이기가 체용이 됨을 분명히 하는 것일 뿐이라 하였으나 사실은 나정암의 도심은 체요 인심은 용이라는 주장과 앞뒤가 같은 모습이다”0550)고 말하여 여헌의 경위설이 퇴계의 정론과는 어긋나는 나정암, 율곡과 같은 이기일물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여헌의 경위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자. 여헌은 구체적인 우주의 시원으로 ‘道’를 상정하였다. 그는 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주 이하는 이른바 형이하자요 도는 소위 형이상자이다. 형이하자란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안이 있고 밖이 있으나 형이상자는 시작도 끝도 안도 바깥도 없다. … 이로 미루어 소급해 보면 우주가 나기 전에 도는 이미 있었고 이를 미루어 앞으로 나아가 보면 우주는 없어지지만 도는 무궁하다(張顯光,≪旅軒性理說≫권 8, 宇宙說).
도에 대한 이러한 여헌의 해설은 마치 장재나 화담의 일기에 대한 설명과 유사한 것 같다. 여헌은 이러한 형이상자로서의 도로부터 우주와 천지가 생성되어 나온다고 한다. 이기는 이 때 작용하는 도의 두 속성이다. 그러므로 도는 곧 이기의 실체요 통합자이다. “이른바 도는 이기를 합하고 체용을 겸한 常一 常存하는 존재이다. … 도는 그 理로써 經을 삼고 그 氣로써 緯를 삼는다”0551)고 했다. 따라서 이기는 二物이 아니며 도의 체용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기의 관계에서만 볼 때에는 경을 위주로 하고 경으로써 위를 다스린다고 하여 전통적인 理 위주의 사고방식을 따르고 있다.
여헌은 당시의 학자들이 이를 몰라서 이기를 이원적으로 해석했다고 하여 퇴계의 理自理氣自氣決是二物說을 비판하고 있다. 여헌이 이러한 경위설은 한편에서는 이기의 근원이 같음을 밝히고 있어 율곡의 이기불상리에 부합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경과 위는 엇갈리는 두 속성으로 經, 즉 理가 천지만물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퇴계의 불상잡을 만족시키고 있어 도체론의 면에서는 퇴율을 벗어난 새로운 이론체계이나 이기론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절충적이라 하겠다.
미수 허목의 우주론도 여헌의 영향을 받아 우주생성론에 치중하고 있는데 여헌보다 이기의 근본이 하나임을 더욱 강조하고 있어 나정암의 설과 보다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理란 氣의 이이다. 이 이가 있으면 곧 이 기가 있게 된다. 기란 이의 기이다. 이 기가 있으면 곧 이 이가 있게 된다”0552)고 하여 이기의 불상리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또 기는 유한하나 이는 무한하다고 하여 퇴계학파의 이를 우위로 보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율곡학파의 절충론은 말 그대로 퇴계의 학설과 율곡의 학설을 절충한 것인데 앞에서 든 우계, 남계, 졸수재 등은 이기의 불상리나 불상잡 어느 한편으로 기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불상리 중에서 불상잡의 측면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성리설을 정립하고 있다. 사단칠정론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기호발의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퇴율을 절충하는 대개의 학설이 비슷하므로 여기서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과 대립한 남계 박세채의 절출론만을 대표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남계의 이기관계에 대한 견해를 보면 그는 太極動以生陽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극이 실지로 음양을 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形化가 그런 것인데 다만 음양이 동정하고 태극은 그 주가 된다는 것이다. … 만약 이 구절 때문에 호발의 설과 같다고 한다면 아마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朴世采,≪南溪集≫권 41, 答沈期仲問近思錄).
남계는 주자가 태극은 동정한다고 말한 것은 태극이 만물의 근본이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지 실지로 발하여 현상화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여 율곡의 설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사단칠정론에서는 율곡처럼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여 사칠이 혼륜한 것으로 보지 않고 혼륜한 면도 있고 나누어지는 면도 있다고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개 사단이 발함에 반드시 氣에 탄다 하더라도 바로 인의예지의 순순한 理로부터 나온 까닭에 이를 주로 하니 理之發이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본연지성이 비록 기질지성 중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그 주된 바를 지칭하여 본연지성이라 하는 것과 같다(朴世采,≪南溪集≫권 55, 四端理發七情氣發說).
여기서 남계는 기발, 기질지성으로 사단칠정을 말해야 하지만 사단은 본질적으로 理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여 퇴계의 호발설이 율곡의 해석처럼 이발과 기발을 별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적용에 따르는 문제라고 해석하여 퇴계의 설과 율곡의 설을 조화 일치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