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동악부체 시가의 출현과 그 발전
과거제도가 실시된 이후 우리 나라의 관료들과 지배층의 학문적 성향이 문학을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역사사실을 문학의 소재로 다루는 경향이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吳世文의≪歷代歌≫이후 李奎報의≪東明王篇≫, 李承休의≪帝王韻紀≫, 高得相과 조선시대 尹淮의≪歷代世年歌≫,≪龍飛御天歌≫로 이어지는 詠史詩歌의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영사시와는 달리 과거의 애국명장이나 역사적 유적 등을 소재로 운문시를 짓는 악부체의 역사시가가 발전하였다. 그 형식은 먼저 역사사실에 대한 소개가 있고 다음 운문의 시를 지었으며, 시간적인 대상은 초기 해동악부에서는 삼국 및 고려시대의 역사내용이 주요한 소재가 되었으나 뒤로 내려가면서 조선 당대의 사건도 해동악부의 소재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다. 공간적으로는 산천이나 인물 등에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0730)
이는 역사와 문학의 만남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데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조선 후기의 양반들이 학문적 연구를 일상적인 과제로 하였고 대부분 한시를 짓는 것을 필수적인 교양으로 여겼으므로, 이러한 악부체는 역사내용을 문학화하는데에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해동악부의 효시적인 것으로는 金宗直(1431∼1492)의≪東都樂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경주지방의 옛 신라에 관한 소재를 취한 것으로 비록 체계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서술내용이나 가사 등으로 볼 때 해동악부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沈光世(1577∼1624)의≪海東樂府≫에 이르러 해동악부체가 정형화하였다.0731)
해동악부는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사림들의 기호에 맞아 조선 후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악부체 시가의 주담당자가 관리나 학자였던 점에서 이 역시 성리학적인 역사관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나 과거의 역사 중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와 산천에 대한 민족적 각성이 반영된 형태이다.0732) 엄격히 말하여 악부는 시가라는 문학이지만 그 서문으로 서술된 내용은 역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