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대사의 편찬
(1) 실록의 편찬과 보관
역대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사업은 조선 전기로부터 계속되었다. 즉 왕이 죽은 후에 實錄廳이 설치되고 편찬관이 임명되어 실록을 편찬함은 이전과 같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신하들에 의하여 포악하거나 패륜을 저지른 군주인 연산군과 광해군이 축출된 두 사건이 일어났고 이 당시의 기록은 ‘實錄’이라 하지 않고 ‘日記’라는 명칭을 붙였다. 일기와 실록과의 차이는 실제 명칭만의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그 구체적인 서술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지는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의 대상이다.0733) 왕위에서 쫒겨난 군주의 실록을 일기라고 칭한 선례는≪魯山君日記≫(≪端宗實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0734) 명칭을 일기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편찬하는 기구명칭도 실록청이 아닌 纂修廳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렇지만 그 편찬진의 구성과 체제는 실록청과 거의 차이가 없다.0735)
이 시기의 실록편찬에 있어서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史論이 많이 쓰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초기는 사관들이 쓴 사론을 실록에 싣지 않았으나,≪成宗實錄≫이후에는 실록에 사관들의 사론이 많이 쓰여지기 시작하였으며, 특히≪中宗實錄≫과≪明宗實錄≫등에는 많은 사론이 실려 있다.0736)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판의식이 왕성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당시 사관들의 성숙된 지적 분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16세기부터 경향 각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던 사림들의 비판의식이 강렬했음을 알 수 있다.
사론을 작성하는데 이용한 자료는 史草와 時政記, 개인 문집 등이 주로 활용되었으며, 이를 작성한 사람은 당대의 專任史官, 견문에 의거 사초를 작성한 官吏, 실록청 개국 후 편성된 編纂官이었다.0737)
한편 사론의 내용에 있어서는 인물에 대한 포폄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는 사림세력이 유교적인 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한 도덕적 감계를 사론을 통해 보인 것으로, 이 당시의 실록 사론이 사림세력의 입장을 대변하였음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관들의 인물평가는 인물에 대한 사실을 구명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관점에서 포폄을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다만 조선 중·후기가 되면서 조선 전기에 비해 인물에 대한 비중이 낮아지고 대신 다른 주제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는 사관의 시각이 다양해지고 그 역할도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0738)
이 시기의 실록편찬과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宣祖實錄≫·≪顯宗實錄≫·≪景宗實錄≫에 대해서는 각 ‘修正(改修)實錄’이 편찬되어 원본과 병치하였으며,≪肅宗實錄≫은 원본에 수정 부분을 첨부하였다는 점이다. 총 221권의≪선조실록≫은 42권으로, 총 15권의≪경종실록≫은 5권으로 수정하였으며, 총 22권의≪현종실록≫은 28권으로 개수하였다.≪숙종실록≫은 권말에 補闕正誤를 부기하고 있는데 이 역시 수정실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실록의 수정 및 개수는 당파와 관련된 내용의 서술에 공정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므로 다른 당이 집권하게 되면 실록을 수정하게 된 것이다. 이들 수정실록에 대해서는 당파적 관계가 내용의 서술과 사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앞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0733) |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국왕에 대한 지칭으로 ‘上’이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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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4) | ≪魯山君日記≫는 ‘靖難日記’라는 이름으로 편찬이 시작되었다(申奭鎬, 앞의 책, 31쪽 참조). |
0735) | 조선 중기의 실록편찬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申奭鎬,≪朝鮮王朝實錄의 編纂과 保管≫(≪韓國史料解說集≫, 韓國史學會, 1964). 裵賢淑,≪朝鮮實錄의 書誌的硏究≫(中央大 博士學位論文, 1989). 金慶洙,≪朝鮮 中宗代의 史官硏究≫(忠南大 博士學位論文, 1996). |
0736) | 韓㳓劤,<明宗實錄 解題>(民族文化推進會). 車長燮,<朝鮮前期 實錄의 史論>(≪國史館論叢≫32, 1994), 28∼36쪽. |
0737) | 金慶洙, 앞의 책, 139∼145쪽. |
0738) | 車長燮, 앞의 글, 36∼6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