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광작과 지주제
1) 농촌사회 분해와 광작농의 대두
(1) 광작과 광작농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는 그 이전 어느 시기보다 급격하게 변동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응책이 절실했다. 특히 兩亂 이후 파괴된 농업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데 대해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대책이 모색되었다. 그 방향은 대체로 국가에 대한 개혁 논리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방식은 당시의 농촌사회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와 관련이 있었다.
17세기의 농촌사회는 양란이라는 외적 충격을 통해 분해되기도 했지만, 내적 충격에 의해 분해되기 시작한 측면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農業生産力 발달과 상품경제 확대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解體期的 양상은 농촌사회를 재편시키는 구체적인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봉건 지배층은 이러한 현상을 체제를 와해시키는 문란한 형태로 보고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했지만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적인 대세였다.
이 시기 농촌사회의 분해는 생산력 발달을 배경으로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의 변동이 가속화되고 있었다는 점이 이전 시기와 달랐다. 이는 양란 이후의 자연조건에 의존한 토지생산성이 17세기 이후 개량된 농법 발달에 따라 점차 향상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사회적 생산력을 전반적으로 제고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의 廣作과 지주제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과 생산관계의 변화 때문이다.
지금까지 광작은 조선 후기 사회변동의 뚜렷한 징표로 주목되어 왔다. 移秧法을 통한 농법 발달은 농업경영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새로운 농업경영형태로서의 광작을 가능케 함으로써 농업사에 있어 획기적인 선을 긋는 사건으로 주목되었다.0123) 이같은 광작의 등장은 농업생산성에 관한 논쟁까지 불러 일으켰고 이후 조선 후기의 농법이 과연 광작을 부정하는 방향에서의 集約的 농법이 주류를 이루었는가0124) 아니면 광작을 중심으로 하는 粗放的 농법이 일반화되고 있었는가의 연구로 귀결되었다.0125) 그것은 결국 이앙법이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는 가운데 광작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 논쟁은 결국 향후 생산방식을 집약화의 방향에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조방적인 농법을 통해 당시의 농업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인가의 세기적인 논쟁을 낳았다. 이러한 논쟁은 안정적인 토지생산성 확보를 통해 소농경영 보호를 구상했던 정부지배층의 反廣作論과 노동생산성 증대를 광작의 방향으로 해소시킴으로써 이앙법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廣作論으로 양분되었다.
조선 후기에 광작농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매매를 중심으로 토지소유 구조가 변화하고 있었고, 나아가 이앙법 등 새로운 농법이 보급됨에 따라 농업 경영상의 변동이 야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회변동은 17세기 이후의 농법발달이 당시의 자연 제약을 한 단계 극복함으로써 나타난 결과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농업기술상의 발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적극 이용하면서 그에 기초한 사회적 생산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즉 그러한 방향은 단위 면적당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집약화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광작을 생각하는 농민층도 나타나고 있었다.
광작은 경작지를 확대시켜 비교적 넓은 농토를 경작하는 것을 말한다.0126) 이같은 광작에 대한 정의는 당시의 자료에도 일반화되어 나타나므로 잘못된 설명은 아니지만, 광작이 왜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때 사용된 광작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었으며 광작농이란 어느 농민층을 의미하는가를 밝힐 때 그 정확한 실상이 밝혀질 것이다.
17세기 이후 광작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지주제 확대로 인해 초래된 농촌사회 위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과정에서 大農, 富農 등으로 불리던 광작농이 경작지를 더욱 넓혀감에 따라 自作農이나 作人層의 경우 경작지를 확보하지 못해 몰락해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경작지 不均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광작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같은 광작문제가 더욱 확대된 직접적인 계기는 새로운 농업기술인 이앙법이 보급되면서부터였다. 그렇지만 이앙법을 통해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광작이 널리 행해질 수는 없었다. 광작을 행할 때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작을 택하기보다는 집약적 농법을 채택하여 밭 작물에 노동력을 투하함으로써 생산성을 높히려는 경향0127)도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이앙법은 광작을 행하는 농민층에게서도 환영을 받을 수 있고, 집약적 농법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는 농민층에게도 환영받을 수 있는 농법이었다.
다음으로 광작이 전반화된 시기를 살펴보자. 그것은 대체로 이앙법 보급 시기와 일치된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의 광작은 직접적으로는 이앙법으로 인해 발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도 이앙법은 실시되었지만 付種法이 일반적이었다.0128) 이앙은 경상도 북부, 강원도 남부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졌고 직파가 어려운 점토층에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0129) 이앙법은 16세기에 들어서 점차 전라도·충청도뿐 아니라 삼남 전역에도 보급되었는데,0130) 이처럼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江南농법의 도입과 川防(洑)의 설치 때문이었다.0131) 이앙법은 17세기에 들어서 더욱 많이 보급되어 17세기 후반에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0132)
이처럼 이앙법이 일반화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이 농업생산력의 측면에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0133) 우선 직파법에서는 4∼5차의 제초 작업을 해야만 결실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앙법에서는 2∼3차로써 족하였다. 게다가 이앙법은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이앙법이 직파법에 비해 생산고가 두 배나 되었다. 노동력 절약도 되고 수확도 배가 되었으므로 이앙은 어떠한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채택할 만한 농법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벼 생산 외에 보리를 함께 이모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앙법이 장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그것의 일반화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즉 농업기술적 측면에서 水利 문제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0134) 이앙법에 대한 조선 초기 이래의 禁令은 모두 수리와 관련이 있었다. 17세기말 숙종연간의<勸農節目>은 이같은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데, 그 귀결은 ‘有水根 引漑處’에서는 이앙을 허용하되 ‘無水根 高燥處’에서는 그것을 철저히 금한다는 것이었다. 영·정조 이후의 이앙에 대한 논의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물을 끌어댈 수 있는 곳의 이앙은 금할 필요가 없지만 水根이 없는 곳은 旱災의 피해가 심하기 때문에 계속 금지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계속 논란이 된 것은 이앙법에 대한 금령이 엄중해도 농민층은 모두 이에 따르지 않고 이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같은 보고는 이앙법으로 인해 초래되는 농촌사회 붕괴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이앙법으로 인해 旱害를 당하는 농민이 늘게 되면서 농촌사회는 더욱 심각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앙법의 보급이 바로 광작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앙법은 광작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다른 여타 생산조건이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면 광작은 계속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시적으로 이앙법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면 경작지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할 뿐 아니라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 농업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광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작지 확보가 가능해야 하며, 두번째로 노동력이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고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같은 문제는 유통경제를 전제로 한 상업적 농업이 이루어질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로 광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借耕地 확보가 전제되어야 했다. 이 시기 借地競爭은 조선 후기사회의 새로운 단면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현상 중의 하나였다. 차경지조차 상품화되기 시작한 반증이다. 광작 농민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경작지 확보였다. 물론 경영에 관심이 많은 지주의 경우는 얼마든지 자신의 직영지 경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농이나 소·빈농의 경우는 차지경쟁을 통해서만 광작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농은 소·빈농보다 차지경쟁에서 유리하였다. 지주들은 지대수취를 안정되게 보장시켜 줄 수 있는「饒實可信者」에게 토지를 대여하려고 하였다.0135) 부농층은 경작지 보유에 있어 소·빈농보다 우월했고, 農牛나 農器를 갖춘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부농은 지주경영과 같이 토지소유의 확대를 배경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경영 확대를 통해 성장해갔다는 측면에서 경영형부농으로 주목되었다.0136)
경영형부농층은 이 시기 지대의 정액화나 화폐지대의 발생을 배경으로 더욱 경작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賭地는 정률지대인 竝作보다 잉여물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계속 발달할 수 있었다. 나아가 禾利 등의 관행은 도지의 永代小作化를 가능하게 했고 지주의 승낙 없이 타인에게 자유롭게 매매·양도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갔다.0137) 한편 작인층의 성장을 배경으로 지대가 대폭 인하되는 公土(역둔토 등)의 경우에는 中畓主가 성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중답주는 中賭支畓主, 中間小作, 私畓主 등으로 불렸으며 그들의 권리는 상품처럼 매매·전수되기에 이르렀다.0138)
두번째로 雇傭勞動의 확보야말로 광작 경영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농업이 가지는 계절적인 성격 때문에 농번기 노동력을 구하지 못하면 한 해의 농사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광산업·수공업에서처럼 농업에서도 노동 고용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제반 부역노동 역시 점차 雇役을 통해 노동 고용방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0139) 농업에서의 노동력 고용은 부역노동이 ‘給價雇募’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층농민의 경우 대다수는 빈농 또는 ‘無田無佃之農’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력 시장을 통해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시켜 가고 있었으며 주로 城下의 도시빈민층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場市를 통해 고용처를 찾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항상 고용될 만큼 고용처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농촌사회의 경우 계절적으로 농번기에 노동력의 수요가 집중되고 있었다.
농업 고용노동층은 토지로부터 이탈되기 시작한 몰락농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전부터 존재하던 장기 고용노동층인 雇工層과는 다른 임노동층으로서 향촌에서는 단기간 고용되었으며 역시 고공으로 불렸다. 이들의 雇主에 대한 관계는 신분적 예속성이 강한 노비의 奴婢主에 대한 관계와는 달랐다.이들은 고용의 대가로서 고주에 대해 雇價를 청구하였으며 이같은 경제적 관계를 통해 예속관계를 파괴시켜 가고 있었다. 따라서 고용노동이 보편화됨에 따라 雇傭을 구하려는 경우에는 반드시 고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18세기 이후 상품경제 발달에 따라 바야흐로 노동력도 상품화되어 가는 가운데 노동력이 비교적 자유롭게 매매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노동의 대가를 환산하여야 하는 和雇형태였다.0140)
위와 같은 조건이 충족될 때 광작경영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광작농의 경우는 어느 정도의 노동력을 가지고 얼마만큼의 토지를 경작할 때 광작경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자영농의 노동력과 경영면적을 통해 표준 경영규모를 알아보자. 丁若鏞은 당시 1結(40斗落 내지 60두락)의 면적을 2戶가 佃作할 수 있는 적정 면적으로 보았다.0141) 이를 자영농 1호로 다시 환산한다면 20두락, 즉 대략 50負 정도가 표준경영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1호당 가족수를 평균 3∼5명으로 본다면 성인 노동력은 많아야 2∼3인일 것이고,0142) 따라서 노동력 3∼5명으로 1石落(20두락)을 경작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얻어지는 수입은 이들 작인층에게는 최소한의 생계유지가 가능한 정도로 보인다. 자작농인 경우는 약간의 잉여생산물 축적이 가능하였을 것이다.0143)
광작농의 경우는 이들과는 달리 상업적 농업에 목적을 둔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이앙법에서 절감된 노동력을 이용해 ‘多田力作’하고 있었다. 이들의 농업경영은 표준 경영규모라 할 수 있는 3∼5명 기준의 1석락을 훨씬 넘어서는 규모였음을 보여준다. 1결을 차경하는 농민의 식량 지출을 ‘八口食糧’으로 묘사한 정약용의 서술은 광작농의 경작규모를 짐작케 해준다.0144)
광작농은 적어도 경작하는 면적이 표준농가의 2배 내지 4배에 달하는 ‘八口之家’였다.0145) 정약용은 이 ‘8구지가’를 3∼4인 혹은 5∼6인의 성인 노동력을 가질 수 있는 농가로 보았다.0146) 성인 노동력 크기로만 비교한다면 표준경영 농가보다 2∼3배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성인 노동력은 물론 모두 가족 노동력만을 의미하는 대가족일 경우도 있겠고, 노비 또는 고공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간혹 ‘廣地’에 힘쓰는 자들 가운데 “10석락 토지에 10명의 노복을 기르는 자”0147)도 있었다. 10석락에 10여 명의 노복을 통해 광작하는 경우이다. 또한 지주가 작인을 선택할 때 傭奴, 즉 고공이나 부녀자가 있어 일을 거둘 수 있는 上農夫라면 안심하고 경작지를 맡겼다는 것도 가족 노동력 외의 노동력을 갖고 있는 광작농의 경우를 선호한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0148) 그러나 광작농의 경우 가족 노동력이나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노비나 고공이 있다 하더라도 농번기에는 노동력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8인 정도의 노동력을 가진 경우라도 모내기·제초·추수 등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요구될 때에는 반드시 雇人이 필요했다는 것은,0149) 광작농의 경우에도 8인의 노동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별도의 노동력을 고용해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작농의 경우는 표준경영 농민에 비해 경작 면적이 4배 이상 되었다. 광작의 규모는 정약용이 井田論에서 노동력에 따라 토지분급을 행할 경우, 2인의 성인 노동력은 25畝를 분급하고 5, 6인의 성인 노동력을 갖춘 가족에는 그 4배인 100무를 지급해야 한다고 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0150) 게다가 이앙법을 통해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으므로 광작농은 다음과 같이 같은 노동력으로 약 4배까지 경작면적을 넓힐 수 있었다.
附種으로 불과 10여 두락을 짓던 자가 이앙하면 가히 1, 2石落을 광작할 수 있다(≪日省錄≫정조 22년 5월 22일).
그러면 광작을 통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어느 정도였을가?
정조 때 申在亨은 이앙법을 행하는 광작의 경영규모가 적어도 3, 4석락 즉 60∼80두락 정도이고 크면 6, 7석락까지 경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0151) 그러나 경영규모가 5석락 이상이 되면 토지가 황폐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되기도 하였다.0152)
이렇듯 광작의 규모는 이앙법이 보급될수록 커질 수 있었고 대략 4석락 즉 80두락 정도였다. 그 이상을 경작하는 것은 농업자본을 얼마나 투자하고 경영에 힘쓰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작농은 어떠한 농민으로 구성되었을까?
광작은 자신의 가족 노동력 혹은 그것을 보충하는 노동력(노비 혹은 고공)으로써 자신의 경작지를 확대해가는 행위를 말하므로 그 주체는 지주층도 포함하여 自耕이나 借耕을 행하는 자영농민·작인농민을 의미한다. 이들 가운데는 상업적 농업을 배경으로 力農하는 경영형부농도 포함되어 있다.
우선 지주층의 광작 행위를 통해 그 양상을 살펴보자. 지주란 상속·매매·개간 등을 통해 집적한 토지를 작인농민에게 대여하여 ‘竝作半收’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병작제를 통해 경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더불어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점차 확대해가기도 했다. 그 중 자신의 직영지경영 확대를 통해 지주경영의 합리화를 꾀하였던 경우가 주목된다. 숙종 34년(1708) 10석락의 토지를 10인의 노복으로 경작하여 ‘廣地’에 힘쓴 자들이 그 중의 하나이다.0153)
그러나 대토지소유자들은 일부를 家作의 형태로 직영하기도 하였지만 광작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중소지주들의 경우 간혹 노비경영이나 대여를 통한 병작보다 경영합리화를 생각하면서 직접 경영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지주경영은0154) 주로 이앙법을 배경으로 임노동을 고용한 농업경영형태로 볼 수 있다.
광작을 주도한 계층은 자작 겸 작인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차지경쟁에서도 우월하였고, “오로지 광작만 일삼는다”0155)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8 口나 되는 上農家”로서 “富人(地主)”으로부터 토지를 빌려 광작을 행하였으나 차경에 대한 대가로 지대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0156) 이들은 차지경쟁에서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제치고 借耕地를 廣占할 수 있었지만 역시 지주의 땅을 차경해야만 하는 농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토지의 상품화와 이앙법의 보급에 따라 광작을 행하던 광작농의 존재는 이 시기 상품경제의 발달과 함께 크게 주목되고 있었다. 지주제가 더욱 확대되고 발전할수록 지주의 토지를 차경하는 광작농의 존재가 두드러지기 마련이었다. 이앙법이 보편화되면서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대토지소유자가 존재하는 한 그들의 토지를 차경하는 광작의 출현은 일반적이었다.
0123) | 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移秧法의 普及에 대하여->(≪亞細亞硏究≫13, 高麗大, 1964;≪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1971). ―――,<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稻麥二毛作普及에 대하여->(≪亞細亞硏究≫16, 1964;위의 책). 宋贊植,<朝鮮後期 農業에 있어서의 廣作運動>(≪李海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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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4) | 宮嶋博史,<李朝後期農書の硏究>(≪人文學報≫43, 京都大學 人文科學硏究所, 1977). ――――,<朝鮮後期における朝鮮農法の發展>(≪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1981). 이호철,<조선시대의 농업사>(≪한국의 사회경제사≫, 한길사, 1986). 이영훈,<한국자본주의의 맹아문제에 대하여>(위의 책). |
0125) | 宋贊植, 앞의 글. |
0126) | 宋贊植, 위의 글. |
0127) | 金建泰,<朝鮮中期 移秧法의 普及과 그 意義>(≪國史館論叢≫63, 國史編纂委員會, 1995). |
0128) | 金容燮, 앞의 글(1964a). |
0129) | 李鎬澈,<水田農法>(≪朝鮮前期農業經濟史≫, 한길사, 1986). |
0130) | 廉定燮,<15-16세기 水田農業의 전개>(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93). |
0131) | 李泰鎭,<16世紀의 川防(洑)灌漑의 발달>(≪韓國史論≫31, 서울大, 1994). |
0132) | 金容燮, 앞의 글(1964a·b). |
0133) | 金容燮,≪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一潮閣, 1970), 26∼37쪽. |
0134) | 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移秧과 水利問題->(≪亞細亞硏究≫18, 1965;위의 책). |
0135) | 金容燮,<18世紀 農村知識人의 農業觀>(≪증보판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지식산업사, 1995). 李潤甲,<18세기 말의 均並作論-洪州儒生 李光漢의 貸田論을 중심으로->(≪韓國史論≫9, 서울大, 1985). |
0136) | 金容燮,<朝鮮後期의 經營型富農과 商業的 農業>(≪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1969). |
0137) | 허종호,≪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1965;한마당, 1989). |
0138) | 愼鏞厦,<李朝末期의「賭地權」과 日帝下의「永小作」의 關係-小作農賭地權의 所有權으로의 成長과 沒落에 대하여->(≪經濟論集≫Ⅵ의 1, 서울大 한국경제연구소, 1967). 金容燮,<韓末에 있어서의 中畓主와 驛屯土地主制>(≪東方學志≫20, 延世大 國學硏究院, 1978). 裵英淳,<韓末驛屯土調査에 있어서의 所有權 紛爭>(≪韓國史硏究≫25, 1979). |
0139) | 姜萬吉,<官業에서의 賃金勞動制의 발달(1·2)>(≪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尹用出,≪17, 8세기 徭役制의 變動과 募立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
0140) | 崔潤晤,<조선후기「和雇」의 성격>(≪忠北史學≫3, 1990). ―――,<18·19세기 농업고용노동의 전개와 발달>(≪韓國史硏究≫77, 1992). |
0141) | 丁若鏞,≪牧民心書≫권 5, 戶典 平賦. |
0142) | 四方博,<李朝人口に關する一硏究>(≪朝鮮社會法制史硏究≫, 京城帝大法學會論集 9, 1937) 李光奎,≪韓國家族의 史的 硏究≫(一志社, 1977). |
0143) | 金容燮,<續 量案의 硏究>(앞의 책, 1995). |
0144) | 丁若鏞,≪牧民心書≫권 5, 戶典 稅法下. |
0145) | 李潤甲, 앞의 글. |
0146) | 朴宗根,<茶山丁若鏞の土地改革思想>(≪朝鮮學報≫28, 1963). |
0147) | ≪承政院日記≫443책, 숙종 34년 7월 8일 公州閑良尹弼殷上䟽. |
0148) | 丁若鏞,≪經世遺表≫권 5, 田制 1. |
0149) | ≪日省錄≫정조 23년 3월 28일. |
0150) | 丁若鏞,≪經世遺表≫권 5, 田制 3 및 권 6, 田制 4. |
0151) | ≪正祖實錄≫권 50, 정조 22년 11월 기축. |
0152) | ≪日省錄≫정조 23년 3월 28일. |
0153) | ≪承政院日記≫443책, 숙종 34년 7월 8일 公州閑良尹弼殷上䟽. |
0154) | 金容燮,<朝鮮後期 兩班層의 農業生産-自作經營의 事例를 중심으로->(≪東方學志≫64, 1989). |
0155) | 禹夏永,≪水原儒生禹夏永經綸≫務本條(奎章閣圖書 3202). |
0156) | ≪日省錄≫정조 23년 2월 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