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수산양식업
수산양식업에서 주요한 것은 어류 양식, 패류 양식 및 해조류 양식이다. 조선 후기까지는 어류 양식이나 패류 양식은 거의 하지 않았다. 양식업은 자연산의 어획만으로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울 때 특정 수산물의 선택적 생산확대 방법의 하나로 행해지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류나 패류 자원이 매우 풍부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양식의 필요성이 거의 없었다. 양식업으로서 발달한 것은 해조류 양식의 일종인 김 양식업뿐이었다.
최초의 김 양식 방법은 가지가 붙은 나무나 대, 즉 섶(섶나무)을 바다에 꽂아 김을 부착시키는 섶꽂이(一本篊)법이다. 이 방법에 의한 김 양식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즉≪東國輿地勝覽≫의 전라도 光陽郡 토산조에 海衣, 즉 김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광양만에는 자연산 김인 돌김이 전혀 나지 않으므로 광양의 김은 섶꽂이 양식에 의해 생산된 김일 것으로 추정되었다.0601) 그러나 이를 확증할 길은 없다. 일찍부터 발달한 어전의 날개 중 일부는 섶을 세워 만든 것도 있었으므로 이 섶에 김이 착생하는 것을 보고 섶꽂이식 김 양식업을 개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 양식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으나0602) 신빙성이 있는 것은 太仁島에서 인조 때 김 양식이 개시되었다는 전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근래에 발견되었는데 金汝瀷이라는 사람의 묘비가 그것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그는 선조 39년(1606)에 영암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병자호란 때 그의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선이 청에 항복한 뒤 인조 18년(1640) 태인도로 가서 그 곳에서 김을 양식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태인도에서는 17세기 중엽에 김 양식이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김이 많이 양식되었다.≪輿地圖書≫의 물산조에 김이 포함되어 있는 곳을 보면, 충청도의 靑山·結城·庇仁, 황해도의 長連·康翎·瓮津, 전라도의 靈岩·興陽·羅州·長興·珍島·寶城, 경상도의 慶州·盈德·東萊·淸河·迎日·長鬐·機張·寧海·蔚山·興海 등이다. 이들 중 일부 지방에서 김이 양식되고 있었을 것이다. 구한말의 양식지를 참작할 때,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많이 양식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섶꽂이 양식보다 발달한 방법은 대발을 설치하여 김을 양식하는 떼발(簾篊)양식이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양식은 莞島郡 助藥面 藏龍里에 살던 鄭時元이 그 곳 앞바다의 竹島 부근에 어전을 설치하였는데, 그 어전의 대발에 김이 부착하여 발육이 좋은 것을 보고, 어전의 발을 모방하여 떼발을 만들어 김을 양식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0603) 장용리에 많이 살고 있는 文獻公派 鄭氏의 족보에 정시원이 실존 인물로 나오고 그의 출생연도가 정조 21년(1797)으로 되어 있으므로 떼발식 김 양식법은 19세기 초엽이나 중엽무렵에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방법의 개발은 김 양식업에 있어서 기술 혁신이었으며, 후일 일본에서 뜬발(浮篊)식 양식법의 개발에 응용되기도 하였다. 김 양식업의 조기적 발달을 자랑하는 일본에 앞서서 우리 나라에서 김 양식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김은 우리 나라 사람이 일찍부터 즐겨 먹었던 기호 수산물로 수요가 많았다. 수요가 증가됨에 따라서 양식법을 개발하여 김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