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마확보의 변화와 고립제
가. 마호입역제의 실시
교통운송 수단으로서의 역마확보는 역제운영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다. 조선 초기에 역마를 확보하는 방법의 하나는 驛民의 立役에 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驛吏나 驛卒 그리고 館軍 등을 驛戶로 편성하여 국역 대신 身役의 하나로서 立馬役을 부과함으로써 역마를 확보하였던 것이다.0685)
그러나 이와 같은 역호에 의한 입마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역리나 역노비 그리고 관군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컸고, 그리하여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잦은 사신의 왕래로 쉴 틈 없이 迎送과 支待업무에 종사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역마값이 앙등함에 따라 재산을 다 팔아서 입마해야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역호의 고역과 말값의 앙등, 나아가 이를 견디지 못한 역호의 유망 등으로 역로가 조잔해지고 또한 역마확보가 어렵게 되자 이에 대한 대책의 수립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역호를 확보하여 입마케 하는 방안과 목장마 등의 관마를 분급해주는 방안 등이 제기되었으며, 역 부근의 민호를 뽑아 助役戶로 삼아 입마케 하거나 하삼도 및 타도의 역리를 刷出하거나 윤번 입역시키는 방법 등도 나왔다.0686)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는 한계가 있어 역마확보 방안이 새로이 모색되었다. 즉 종래 驛役을 세습하지 않던 평민들도 자원하여 馬位田를 경작케 함으로써 입마역을 부담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역호에 의한 입마역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른바 馬戶에 의한 입마역의 대두가 그 하나이다.
‘馬戶立役’이란 입마자의 하나인 마호에게 마위전이나 復戶田를 지급하여 거기서 얻은 수확으로써 입마역을 부담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마호라는 것은 지방 수령의 신·구관 영송시에 입마와 책응을 맡은 자인데, 마호가 말값의 앙등으로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馬戶保를 정하여 保價를 징수함으로써 입마가를 보충하였던 데서 유래했다.0687) 말값의 마련이 마호에게만 부담된 것은 아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民結에서 징수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대부분 마호가 입마역을 주로 담당하였다.
한편 마호는 연산군 8년(1502) 3월에 평민들에게 마위전을 경작하는 대신 입마역을 허락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 때를 전후하여 형성되지 않았나 추측된다.0688) 신분적으로는 마호는 역졸 등의 역민이나 평민 등으로 편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형성된 마호는 마위전과 복호결의 경제적 토대 위에 역마를 공급하였다. 원래 마위전은 역마의 등급에 따라 대마 7結, 중마 5결 50負, 복마 1필에 4결씩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0689) 지역 사정에 따라 원칙이 꼭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마위전의 경작은 마호가 직접 경작하여 수세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토호의 침탈이나 그 밖의 여러 사정으로 병작제에 의한 賭地를 수세하는 경우가 흔하였다.0690) 한편 복호결은 역리·역졸을 포함하여 관군이나 마호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도와주고자 지급한 免賦出稅田이었다.0691) 원래 복호는 호역을 면제하는 것을 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田結에 대한 부역을 면제하게 됨으로써 ‘田結給復’ 혹은 ‘給復田’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급복전은 마호에게 지급되어 수세함으로써 역마가를 마련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호에 의한 역마공급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역민들이 역역을 천역시하여 軍門에 편입되거나 마위전의 사적인 매매, 복호결의 預買0692) 또는 和賣 등의 폐단으로 마호가 실업하여 유망·도산하는 지경에 이르자 마호에 의한 역마공급은 커다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완책으로「驛馬雇立制」를 시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