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마고립제의 시행과 고마가확보
역마고립제란 ‘雇貰’ 또는 ‘驛馬雇價’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고가를 지급하고 역마를 사들여 각 역에 분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역호나 마호의 조잔·유망이나 역전의 사적인 매매, 그리고 복호 예매 등으로 마호에 의한 역마확보책이 난관에 부닥친 데 따른 보충방법으로 실시된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조선 후기에 점차 보편화되었던 賦役勞動의 雇立化 현상이나0693) 요역에서의 募立制의 발달,0694) 즉 노동력의 임금고용화 추세에 수반하여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마고립제의 유래는 사신왕래에 따른 역마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실시되었던 仍把·補把法에서부터 비롯되었다.0695) 물론 조선 전기에도 역마가 부족하면 다른 도의 역마를 刷出하여 입마시키거나 鄕吏·日守 등의 말을 刷馬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이와 같은 쇄마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방법이었다. 양란 이후 부족한 역마를 보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어 마호입역제 등이 실시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역전이 황폐화되고 역민이 거의 유망하다시피한 현실 속에서 각 군현의 말을 쇄마하는 것 또한 많은 폐단이 있었다. 이렇듯 임란 이후 역마확보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또한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으로 驛馬價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역마고립제는 하삼도의 역마를 이동시켜 역마를 보충하게 하고 민결에서 말값을 징수하여 쇄마고립하게 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대중국교통로의 중요한 통과지점으로 다른 역로보다 사신영송 등의 일과 연관이 깊었던 경기·평안·황해도는 해당 도의 역마가 부족할 때 다른 도의 역마를 仍把하거나 補把하는 방법이 유효하였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하삼도에서, 평안도의 부족한 역마는 함경도에서, 황해도에서 필요한 것은 강원도 등에서 말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다른 도의 역마를 먼 곳으로 이동하여 立馬시키는 것은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이에 먼거리를 왕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補馬價를 마련하여 지급할 바에야 차라리 가까운 곳에서 역마를 고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이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현종 9년(1668) 보파법은 폐지되고 雇馬法 즉 역마고립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0696)
그런데 역마고립제가 원만하게 실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雇馬價가 확보되어야 했다. 고마가는 첫째, 역리·역졸이나 마호로부터 징수한 身貢錢에서 보충되었다.0697) 둘째, 역마고립제가 실시되면서 일반 민호에서도 징수되었다.0698)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각 역에서 직접 관장하지 않고 감영이 민호로부터 布를 거둬 역마를 구입하여 각 역에 분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과 감영이 재정적 측면에서 상호보완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찰방과 감사와의 재정관리상의 마찰도 많았다.
셋째, 兵曹木·監營木 또는 管餉穀·詳定米 등 국가재정의 일부로써 역마가 충당되는 경우도 많았다.0699) 이외에도 入居木이나 貰把米로써 충당되었다. 입거목이란 종전에 삼남 및 영동지방의 각 역의 人馬를 경기감영에 立番하게 하던 것을 京驛의 침학이 심하여 폐지하는 대신 입거목을 거둬들여 六驛에 분급하던 데서 유래된 것이다.0700) 이 입거목은 주로 畿驛의 驛馬故失에 따른 역마가를 보충하기 위해 징수한 것인데 지방 각 역들은 역민으로부터 징수하여 경기감영에 상납하였다. 그리고 세파미 역시 경역의 재정과 역마가를 보충하기 위해 징수한 것으로, 강원도 및 삼남의 각 역으로부터 復戶米 3/100을 기역에 移給한 것을 말한다.0701) 이 세파미는 대동미에 포함시켜 징수하여 선혜청에서 出給하였으나 나중에는 경기감영에 직납토록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역마고립가는 주로 병조 또는 감영의 재정이나 민결로부터 고마가를 징수하여 보충하였으나 그것은 역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 역마고립가의 확보 실태를 영남지방의 각 驛誌에 수록된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0702) 첫째 屯田畓을 경작하여 그 소출로써 충당하는 경우, 둘째 역민이나 保人으로부터 身貢錢을 징수하는 경우, 셋째 각 역과 역리·역졸에게 지급된 복호결에서 징수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역마고립제는 역호나 마호에 의한 立馬役만으로 역마를 확보할 수 없게 되자 그 해결 방안으로 강구된 변통책이었다. 이 때 雇立價는 민결로부터 징수하거나 병조·감영·병영 등의 지원을 받아 마련하였다. 특히 민호로부터 징수함으로써 역호의 입마역은 민호에게 분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0693) | 姜萬吉,<조선후기 雇立制 발달-差備軍과 造墓軍 등의 雇立化를 중심으로->(≪韓國史硏究≫13, 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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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4) | 尹用出,<17·8세기 役夫募立制의 성립과 전개>(≪韓國史論≫8, 서울大, 1982). |
0695) | ≪備邊司謄錄≫18책, 효종 7년 5월 4일 및 34책, 숙종 4년 3월 15일. |
0696) | ≪備邊司謄錄≫30책, 현종 12년 12월 12일. |
0697) | ≪備邊司謄錄≫122책, 영조 27년 2월 26일. |
0698) | ≪備邊司謄錄≫3책, 인조 2년 정월 16일. |
0699) | ≪備邊司謄錄≫14책, 효종 원년 2월 8일 및 36책, 숙종 8년 2월 8일. |
0700) | ≪備邊司謄錄≫109책, 영조 17년 7월 2일. |
0701) | ≪備邊司謄錄≫90책, 영조 7년 8월 15일. |
0702) | ≪嶺南驛誌附事例≫長水道本外驛事例冊 召村道驛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