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군량미·진휼미의 운송
세곡의 운송과 같이 지속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군량미·진휼미의 운송도 그 규모가 적지 않았다. 비록 간헐적으로 행해졌지만, 군량미 운송의 경우, 그 운송물량이 수십만 석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주변 국가와 친선관계가 이루어져 국방체제에 그다지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왜란·호란을 겪은 조선 후기에도 국방체제는 수도권 방어에 중점이 있었다. 訓鍊都監을 비롯한 5군영도 그 근본 의도는 수도권 방어에 있던 군대시설이었다. 따라서 군량미의 비축도 수도권에 한정되었으니, 강화도·남한산성·북한산성 등이 그러한 곳들이었다. 그리하여 군량미는 별도로 운송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적대집단은 北狄과 南倭였고, 특히 호란을 전후하여 대륙에서 국제정세가 미묘해지면서 국경지대에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관방시설을 정비하고 군비를 강화하면서 군량미를 비축시켜야 했다. 국경지대의 군량미 확보를 위해 조선정부는 초기부터 평안도·함경도의 세곡을 그 지방에 그대로 두어 군수에 충당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매우 척박하여 세곡량이 많지 않았으므로, 남부지방에서 군량미를 확보하여 국경지대로 운송해야 했다.
군량미의 운송은 원칙적으로 兵船이 전담하고 있었다.0748) 그러나 운송해야 할 군량미는 때로 수만 석 내지 수십만 석에 이르고 있었다. 예컨대 세종 30년(1448) 24만여 석, 세조 13년(1467) 10만여 석, 인조 14년(1636) 4만여 석이 국경지대로 운송된 바 있었다.0749) 운송물량이 많아서 병선만으로는 그 운송을 모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사선이 운송용역에 동원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京江船이 군량미운송에 참여하고 있다.0750)
조선 후기 국경지방으로 군량미를 운송해야 했던 것은 군비강화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광해군 13년(1621) 明나라의 장수 毛文龍의 군대가 後金에게 빼앗긴 요동지방을 되찾고자 평안도 철산군 椵島에 진을 치면서부터였다. 그에 앞서서 광해군은 국경지대의 군비를 강구했지만, 다행히도 당시 의주에는 7만여 석이 비치되어 있어서 남쪽에서 별도로 운반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모문룡의 군대가 장기간 주둔하면서 그것은 거의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서 서북지방의 군비 확보가 시급하게 되었다. 더구나 모문룡의 군대는 그들에게 소요되는 군량을 전적으로 조선에 의탁하고 있었다. 그 운송도 전적으로 조선측에서 담당해야 했다. 인조 2년(1624) 1만 2천 석이, 그 이듬해 2만 6천여 석이 모문룡 군영에 운반되었다.0751) 모문룡의 군대는 인조 7년(1629) 청군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이후 反淸의 기운이 드세지면서 국경지대의 방어체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서 군량미가 확보되어야 했기 때문에, 군량미의 국경지대로의 운송은 계속되었다. 이 때에 그 운송을 위해 동원된 것은 경강선 등 사선이었다. 漕船이 명맥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세곡운송 자체도 부담스러워 하고 있어서 결국 군량미의 운송은 사선을 세내어 운송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군량미를 비롯한 긴급한 운송은 대개 賃船을 통해서 이루어졌다.0752)
병자호란 후의 대규모 군량미운송은 西糧米운송이었다. 즉 병자호란으로 조선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淸은 그 여세를 몰아 중국 본토로 진격하면서 군량미를 조선에 요구하였는데, 조선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조 22년(1644) 5만여 석의 군량미를 天津으로 운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10만 석을 寧遠으로 보냈다.0753) 이를 위해 漕船은 동원할 수도 없었고, 여러 가지로 논의 끝에 각 도에 運米船이 책정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사선이었다. 당시 동원된 선박은 관선·사선을 합하여 도합 300척에 이르렀다.0754) 그러나 이후 국경지대로의 군량미운송은 거의 없었다. 청나라와 관계가 진전되면서 국방책은 의미가 약화되었고, 그리하여 군량미는 오히려 일반재정 또는 진휼미로 전용되어 갔다. 현종 12년(1671)의 기록에 의하면, 흉년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평안도에 비축되었던 군량미로써 변통하고자 하였다.0755) 그리하여 이제는 역으로 국경지대에서 서울로 군량미가 운송되어야 했는데, 당시 본도 地土船으로서 바다를 운항할 수 있는 선박은 그 수효가 많지 않아서 예전과 같이 경강선에 운송용역을 의뢰하고 있었다. 병선의 동원도 여의치 않고, 조선의 기능은 거의 탈진된 상황에서 군량미운송은 경강선 등 사선이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삼남지방의 세곡을 운송하는 데 차질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0756)
다음 賑恤米도 사선들이 운송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세곡·군량미 못지않게 진휼미도 그 운송물량이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보면, 유난히도 기근과 재난이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재·한재·질병 등으로 기근이 계속되어 그 피해가 전국적으로 파급된 때가 있었는가 하면 몇 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救荒廳·賑恤廳 등이 설치되어 진휼업무를 주관하면서 곳곳에 진휼창을 설치하여 곡물을 비축하였다. 예컨대 전라도 임피의 羅里浦倉, 경상도 연일의 浦項倉, 그리고 순천·나주·사천·비인 등지의 濟民倉 등이 그러한 진휼창으로서 각 창고에는 3만 석 내지 6만 석의 곡물을 비축하고 있어야 했다.0757) 이들 진휼미의 운송은 대개 기근 지역의 지토선으로 운반토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해당 지역의 선박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휼미도 대개 경강선이 운송하고 있었다. 숙종 16년(1690) 기록에 의하면, 경강선은 영남지방에서 소요되는 진휼미 3만 석을 운송하고 있었다.0758)
무릇 세곡·군량미·진휼미 등 관물의 운송은 원칙적으로 관선이 담당해야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관선이 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사선이 맡아 갔다. 경강선 등 사선들은 당초에는 봉건정부의 강제적 징발에 대하여 기피하였지만, 그 반대급부로서 선가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고, 게다가 부수적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어서 점차 관물의 운송용역에 자율적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관물의 운송도 활로의 하나로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그 길을 개척하여 나갔다. 숙종 28년 행사직 李寅燁의 보고에 의하면, 경강선인들에게 희망하는 경우에 한하여 船案에 등록시키고 官穀을 운송케 한다고 하였더니, 선인들 모두가 立案하고자 하였다고 한다.0759) 이는 관부와의 관계라 하더라도 운송관계가 비교적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뚯하는 것이며, 선인들은 그러한 가운데서 나름대로 위치를 굳혀 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0748) | 金容坤,<朝鮮前期 軍糧米의 確保와 運送>(≪韓國史論≫7, 國史編纂委員會, 1980), 285쪽. |
---|---|
0749) | ≪世宗實錄≫권 120, 세종 30년 4월 신유. ≪世祖實錄≫권 42, 세조 13년 6월 갑인. ≪仁祖實錄≫권 31, 인조 14년 7월 정축. |
0750) | ≪備邊司謄錄≫30책, 현종 12년 2월 1일. |
0751) | ≪仁祖實錄≫권 7, 인조 2년 11월 무인. ≪仁祖實錄≫권 8, 인조 3년 정월 정묘. |
0752) | 金容坤, 앞의 글, 157쪽. |
0753) | ≪仁祖實錄≫권 45, 인조 22년 11월 기축. ≪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3월 병신. |
0754) | ≪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3월 갑신. |
0755) | ≪備邊司謄錄≫30책, 현종 12년 2월 1일. |
0756) | ≪承政院日記≫736책, 영조 7년 12월 21일. |
0757) | ≪萬機要覽≫財用編 5, 救荒 및 財用編 6, 諸倉. |
0758) | ≪備邊司謄錄≫44책, 숙종 16년 11월 23일. |
0759) | ≪承政院日記≫408책, 숙종 28년 12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