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Ⅲ. 19세기의 민중운동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2) 항쟁의 과정(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라. 정주성 농성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온 홍경래 이하의 봉기군은 지휘부를 정비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539) 정주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었고 어느 고을보다도 군량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 곳이었다. 홍경래가 김사용·홍총각 등과 함께 서장대에 머물면서 대원수로서 총지휘를 하였고, 성내의 일반 행정은 동헌에서 기거하는 유진장 김이대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농성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인 성문 수비는 金石河·申德觀·吳龍珍·李夏儒·尹孝儉 등의 壯士들이 책임졌다. 또한 진압군이 공격하여 성의 100보 밖에 있을 때는 활로 쏘고 100보 안에 들면 총으로 쏠 것이며, 성밑에 도달하면 돌을 던져 무찌르기로 하고, 일상적으로 성 밖에 복병을 배치하는 등 관군의 공격에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대비하였다. 또 북쪽에서 원군이 곧 도착하리라고 선전하여 민심을 달랬다.

 진압군은 선발대가 정월 2일 정주에 도착하여 농성자들의 항복과 士人들의 의병을 권하는 방을 붙인 후, 5일에는 곽산군수 이영식, 우후 이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소모장 諸景彧, 숙천부사 李儒秀, 순천군수 오치수 등이 이끄는 병력으로 정주성을 일차 공격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의 반격을 받아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하였다. 한편 박기풍이 이끄는 3초의 순무영 군사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 개성에 도착하여 1초와 합세한 후 정월 10일에는 안주를 출발하여 그날 정주성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정월 11일에 이르러 정주성을 포위한 진압군의 숫자는 서울과 개성에서 동원된 1,000여 명과 안주·평양 및 인근 지역에서 동원된 군사들을 합하여 8,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진압군은 16일에 대포와 구름다리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을 다시 감행하였다. 그러나 성에 접근하기를 기다려서 맹렬히 반격하는 봉기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소모장 제경욱과 순무영 군관 金大宅을 포함한 21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에는 봉기를 사전에 알지 못한 데다가 봉기군의 정주성 점거를 막지 못했고, 더구나 위와 같이 패전을 거듭하는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평안감사 이만수와 병사 이해우를 삭직하였다. 그리고 새 감사에는 정만석을 임명하였고 병사는 순무영 중군을 맡아온 박기풍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개편된 지휘부의 관군은 19일 새벽에 또다시 총공세를 폈다. 그들은 각 방향으로 공격하여 동문의 경우 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봉기군이 근접한 거리에서 활과 총을 쏘며 저항하자 회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진압군은 4명의 전사자와 43명의 부상자를 냈다.

 봉기군의 농성 전술은 시간이 흐르고 관군의 공격을 이겨내는 동안 더욱 정비되었다. 진압군의 야습에 대비하여 횃불을 밝히고 총을 쏘기도 하였으며, 군악을 연주하여 자기들의 기세를 돋우는 한편, 진압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장기 농성에 대비하여 사창곡은 물론 부민들이 지닌 곡식과 염장을 거두고, 충분한 우물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북진군이 해산된 후에도 봉기군의 사기에 진압군이 압도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진압군은 민간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방화와 살인을 계속 저질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그런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계속 내려야 했고, 심한 자는 효수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주성 주위뿐만 아니라 이미 진압군이 제압한 지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무고한 평민들의 목을 잘라 전과를 과장하는 일이 조정에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분격한 많은 민인들이 적극적으로 정주성 농성을 도왔다. 그들은 관군의 정세를 염탐하여 봉기군에게 제보하는 정도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이름이 다 알려질 만큼 공개적으로 군량을 정주성으로 날라다 주었다.

 진압군은 2월 3일에 군사 지휘관을 총동원하고 특별히 만든 輪梯 5대를 앞세워 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윤제는 성을 내려다볼 정도로 높았다. 그 위에는 총수를 숨겨 공격하게 하였고 안에는 성을 넘을 군사들을 숨겼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계속하여 싸웠으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봉기군을 당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오히려 봉기군이 성밖으로 쳐나와 진압군의 대포를 빼앗으려는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진압군의 반격으로 퇴각하였으나, 봉기군은 이틀간의 전투로 진압군에 사망 11명, 부상 123명이라는 희생을 안겨주었다. 이 전투가 있던 날 조정에서는 정주성 공략에 성과를 올리지 못한 순무영중군 겸 평안병사인 박기풍을 삭직하고 평안병사에 申鴻周, 순무영중군에 柳孝源을 임명하였다.

 그 후로는 주로 봉기군이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 까닭은 농성이 계속될수록 진압군도 초조해졌겠지만, 봉기군은 보급을 받을 수 없어 더욱 불리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포위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성 밖으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19일 새벽에 봉기군이 성을 나와 격심한 전투를 벌였다. 먼저 동문과 남문으로 각 100여 명이 나와 매복한 후 남문에서 400∼500명의 보군이 30∼40명의 총수를 앞세우고 총격전을 벌여 한낮까지 싸웠으나 10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는 피해만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 때에는 이미 강계·영변 등지의 射手들이 진압군에 동원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투는 23일에도 비슷하게 벌어졌다.

 25일에는 진압군이 새로 완성된 윤제와 거의 모든 지휘관을 동원하여 6개 방향으로 총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윤제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성에 접근한 것마저도 봉기군의 화공에 의해 불태워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이 전투에서 관군은 사망자 12명, 부상자 144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지만, 정주성 공략에는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이후 봉기군은 횃불을 더 밝히고 풍악도 더 크게 울리면서 밤새도록 사기를 북돋았다.

 3월 들어 봉기군은 더욱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8일에는 홍경래가 직접 1,000여 명을 이끌고 함종부사 윤욱렬과 의병장 허항의 부대를 불로 공격하여 사망 70명, 부상 137명의 피해를 입히고 봉기군에서도 46명이 죽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도 활로를 뚫을 수가 없었다. 봉기군은 20일에도 군량을 나르느라 대오가 흐트러진 진압군 부대를 공격하여 의병장 허항과 관군 22명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반격을 받아 48명의 사망자를 냈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져서, 홍총각과 嚴啓良이 지휘한 22일의 공격에서는 17명의 관군을 죽였으나 봉기군 69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87명도 곧 처형당하였다.

 위와 같이 농성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봉기군 지휘부에서는 ‘胡兵’이 구하러 올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선전하여 민심을 이끌어갔으며, 정월 말에는 창성·벽동 등지로 가서 원군을 이끌어 올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진압군의 동정을 염탐하는 일을 비롯하여 평양·영유·영변·안주 등 진압군의 후방을 방화 등의 방법으로 교란할 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540) 또한 북진군에서 흩어져 체포된 후 진압군에 가담한다는 조건으로 처형을 면하고 別義兵이라는 이름으로 정주성에 투입되었던 인물들도 달아나거나 심지어 다시 봉기군에 가담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서울에서는 김사용의 지시를 받은 兪漢淳이 정세와 관군 소식을 탐문하고 남문 기둥과 구장용영 대문에 괘서를 붙여 민심을 선동하는 활동을 하다 2월에 잡혀 처형되었다. 양반인 韓基朝는 서울에 살면서도 봉기 지휘자에게 글을 보내 거사에 가담했다가 봉기군이 용천에서 패퇴한 후 그 문서가 알려짐으로써 처형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벼슬살이까지 한 朴鍾一·李振采 등이 봉기에 가담하기 위하여 도성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봉기군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주성 내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곡식이 떨어져 군병들에게 당초 하루 2승씩 주던 배급을 1승 5합, 1승, 나중에는 6합까지로 줄였다. 소나 돼지 등은 물론 말도 10여 필을 남기고는 거의 잡아먹었고, 횃불을 올리기 위해 성내의 집도 부쉈다. 3월 말에는 인구를 줄일 목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노약자와 부녀자 227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가운데 이제초의 동생인 李濟臣을 중심으로 홍경래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일사분란한 지휘체계에 별 흔들림이 없었다. 관군에서도 홍경래의 친척들을 성내로 잠입시켜 그를 암살하려는 공작을 벌였으나 성의 수비가 엄하여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4월 들어서도 관군의 공격은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3일부터는 성을 폭파할 목적으로 굴을 파기 시작하였다. 굴착은 마침내 18일에 완료되었다. 이에 인근 광산의 화약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19일 새벽에 화약 1,800근에 불을 붙임으로써 성 북쪽벽이 폭파되었다. 이 때를 틈타 진압군이 성안으로 진격하였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전사하였고, 홍총각·김이대·윤언섭·楊時緯 등은 사로잡혔다. 우군칙·이희저·최이륜 등은 난군에 섞여 달아났으나 구성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농성에 참여했다가 정주성에서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이었다. 이중 10세 이하 소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23일에 모두 참수되었다.

539)鄭奭鍾, 앞의 글(1972) 참조.
540)鄭奭鍾, 앞의 글(1985)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