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정주성 농성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온 홍경래 이하의 봉기군은 지휘부를 정비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539) 정주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었고 어느 고을보다도 군량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 곳이었다. 홍경래가 김사용·홍총각 등과 함께 서장대에 머물면서 대원수로서 총지휘를 하였고, 성내의 일반 행정은 동헌에서 기거하는 유진장 김이대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농성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인 성문 수비는 金石河·申德觀·吳龍珍·李夏儒·尹孝儉 등의 壯士들이 책임졌다. 또한 진압군이 공격하여 성의 100보 밖에 있을 때는 활로 쏘고 100보 안에 들면 총으로 쏠 것이며, 성밑에 도달하면 돌을 던져 무찌르기로 하고, 일상적으로 성 밖에 복병을 배치하는 등 관군의 공격에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대비하였다. 또 북쪽에서 원군이 곧 도착하리라고 선전하여 민심을 달랬다.
진압군은 선발대가 정월 2일 정주에 도착하여 농성자들의 항복과 士人들의 의병을 권하는 방을 붙인 후, 5일에는 곽산군수 이영식, 우후 이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소모장 諸景彧, 숙천부사 李儒秀, 순천군수 오치수 등이 이끄는 병력으로 정주성을 일차 공격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의 반격을 받아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하였다. 한편 박기풍이 이끄는 3초의 순무영 군사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 개성에 도착하여 1초와 합세한 후 정월 10일에는 안주를 출발하여 그날 정주성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정월 11일에 이르러 정주성을 포위한 진압군의 숫자는 서울과 개성에서 동원된 1,000여 명과 안주·평양 및 인근 지역에서 동원된 군사들을 합하여 8,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진압군은 16일에 대포와 구름다리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을 다시 감행하였다. 그러나 성에 접근하기를 기다려서 맹렬히 반격하는 봉기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소모장 제경욱과 순무영 군관 金大宅을 포함한 21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에는 봉기를 사전에 알지 못한 데다가 봉기군의 정주성 점거를 막지 못했고, 더구나 위와 같이 패전을 거듭하는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평안감사 이만수와 병사 이해우를 삭직하였다. 그리고 새 감사에는 정만석을 임명하였고 병사는 순무영 중군을 맡아온 박기풍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개편된 지휘부의 관군은 19일 새벽에 또다시 총공세를 폈다. 그들은 각 방향으로 공격하여 동문의 경우 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봉기군이 근접한 거리에서 활과 총을 쏘며 저항하자 회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진압군은 4명의 전사자와 43명의 부상자를 냈다.
봉기군의 농성 전술은 시간이 흐르고 관군의 공격을 이겨내는 동안 더욱 정비되었다. 진압군의 야습에 대비하여 횃불을 밝히고 총을 쏘기도 하였으며, 군악을 연주하여 자기들의 기세를 돋우는 한편, 진압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장기 농성에 대비하여 사창곡은 물론 부민들이 지닌 곡식과 염장을 거두고, 충분한 우물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북진군이 해산된 후에도 봉기군의 사기에 진압군이 압도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진압군은 민간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방화와 살인을 계속 저질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그런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계속 내려야 했고, 심한 자는 효수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주성 주위뿐만 아니라 이미 진압군이 제압한 지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무고한 평민들의 목을 잘라 전과를 과장하는 일이 조정에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분격한 많은 민인들이 적극적으로 정주성 농성을 도왔다. 그들은 관군의 정세를 염탐하여 봉기군에게 제보하는 정도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이름이 다 알려질 만큼 공개적으로 군량을 정주성으로 날라다 주었다.
진압군은 2월 3일에 군사 지휘관을 총동원하고 특별히 만든 輪梯 5대를 앞세워 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윤제는 성을 내려다볼 정도로 높았다. 그 위에는 총수를 숨겨 공격하게 하였고 안에는 성을 넘을 군사들을 숨겼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계속하여 싸웠으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봉기군을 당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오히려 봉기군이 성밖으로 쳐나와 진압군의 대포를 빼앗으려는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진압군의 반격으로 퇴각하였으나, 봉기군은 이틀간의 전투로 진압군에 사망 11명, 부상 123명이라는 희생을 안겨주었다. 이 전투가 있던 날 조정에서는 정주성 공략에 성과를 올리지 못한 순무영중군 겸 평안병사인 박기풍을 삭직하고 평안병사에 申鴻周, 순무영중군에 柳孝源을 임명하였다.
그 후로는 주로 봉기군이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 까닭은 농성이 계속될수록 진압군도 초조해졌겠지만, 봉기군은 보급을 받을 수 없어 더욱 불리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포위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성 밖으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19일 새벽에 봉기군이 성을 나와 격심한 전투를 벌였다. 먼저 동문과 남문으로 각 100여 명이 나와 매복한 후 남문에서 400∼500명의 보군이 30∼40명의 총수를 앞세우고 총격전을 벌여 한낮까지 싸웠으나 10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는 피해만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 때에는 이미 강계·영변 등지의 射手들이 진압군에 동원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투는 23일에도 비슷하게 벌어졌다.
25일에는 진압군이 새로 완성된 윤제와 거의 모든 지휘관을 동원하여 6개 방향으로 총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윤제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성에 접근한 것마저도 봉기군의 화공에 의해 불태워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이 전투에서 관군은 사망자 12명, 부상자 144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지만, 정주성 공략에는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이후 봉기군은 횃불을 더 밝히고 풍악도 더 크게 울리면서 밤새도록 사기를 북돋았다.
3월 들어 봉기군은 더욱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8일에는 홍경래가 직접 1,000여 명을 이끌고 함종부사 윤욱렬과 의병장 허항의 부대를 불로 공격하여 사망 70명, 부상 137명의 피해를 입히고 봉기군에서도 46명이 죽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도 활로를 뚫을 수가 없었다. 봉기군은 20일에도 군량을 나르느라 대오가 흐트러진 진압군 부대를 공격하여 의병장 허항과 관군 22명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반격을 받아 48명의 사망자를 냈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져서, 홍총각과 嚴啓良이 지휘한 22일의 공격에서는 17명의 관군을 죽였으나 봉기군 69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87명도 곧 처형당하였다.
위와 같이 농성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봉기군 지휘부에서는 ‘胡兵’이 구하러 올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선전하여 민심을 이끌어갔으며, 정월 말에는 창성·벽동 등지로 가서 원군을 이끌어 올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진압군의 동정을 염탐하는 일을 비롯하여 평양·영유·영변·안주 등 진압군의 후방을 방화 등의 방법으로 교란할 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540) 또한 북진군에서 흩어져 체포된 후 진압군에 가담한다는 조건으로 처형을 면하고 別義兵이라는 이름으로 정주성에 투입되었던 인물들도 달아나거나 심지어 다시 봉기군에 가담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서울에서는 김사용의 지시를 받은 兪漢淳이 정세와 관군 소식을 탐문하고 남문 기둥과 구장용영 대문에 괘서를 붙여 민심을 선동하는 활동을 하다 2월에 잡혀 처형되었다. 양반인 韓基朝는 서울에 살면서도 봉기 지휘자에게 글을 보내 거사에 가담했다가 봉기군이 용천에서 패퇴한 후 그 문서가 알려짐으로써 처형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벼슬살이까지 한 朴鍾一·李振采 등이 봉기에 가담하기 위하여 도성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봉기군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주성 내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곡식이 떨어져 군병들에게 당초 하루 2승씩 주던 배급을 1승 5합, 1승, 나중에는 6합까지로 줄였다. 소나 돼지 등은 물론 말도 10여 필을 남기고는 거의 잡아먹었고, 횃불을 올리기 위해 성내의 집도 부쉈다. 3월 말에는 인구를 줄일 목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노약자와 부녀자 227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가운데 이제초의 동생인 李濟臣을 중심으로 홍경래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일사분란한 지휘체계에 별 흔들림이 없었다. 관군에서도 홍경래의 친척들을 성내로 잠입시켜 그를 암살하려는 공작을 벌였으나 성의 수비가 엄하여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4월 들어서도 관군의 공격은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3일부터는 성을 폭파할 목적으로 굴을 파기 시작하였다. 굴착은 마침내 18일에 완료되었다. 이에 인근 광산의 화약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19일 새벽에 화약 1,800근에 불을 붙임으로써 성 북쪽벽이 폭파되었다. 이 때를 틈타 진압군이 성안으로 진격하였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전사하였고, 홍총각·김이대·윤언섭·楊時緯 등은 사로잡혔다. 우군칙·이희저·최이륜 등은 난군에 섞여 달아났으나 구성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농성에 참여했다가 정주성에서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이었다. 이중 10세 이하 소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23일에 모두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