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Ⅴ. 갑신정변3. 갑신정변의 전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김옥균 등 개화당은 10월 19일 오전 9시 신정부의 혁신정강을 공포한 직후에 청군의 공격을 예견하여 신무기로 방어력을 긴급히 강화하려고 하였다. 지난밤에 일대의 청군이 宣仁門 닫는 것을 방해했던 것이 공격 준비와 관련이 있지 않나 추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정부는 우선 전날 밤 청군의 무리가 선인문 닫는 것을 방해한 데 대해 원세개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앞으로 다시 이러한 일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요지의 항의문을 보내었다. 신정부는 또한 각 병영의 무기고에서 신무기를 꺼내어 정변에 참가한 조선군의 무장을 긴급히 강화하기로 하였다. 수개월 전에 이전의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3,000정을 구입해다가 사용하지 않고 각 영의 무기고에 보관해 둔 것이 있었다. 개화당은 이 최신식 소총을 꺼내어 무장을 강화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기고의 최신식 소총들을 꺼내어 보니 거의 모두 녹쓸어 있었다. 이를 모두 분해소제하고 수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는 본국의 사전 승인없이 개화당의 정변에 참가 협조한 것이 걱정되었는지, 또는 다가오는 사태에 겁을 먹었던 것인지 일본군의 사정으로 보아 궁궐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므로 일본군을 철병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이것은 앞으로 전투를 예견하고 개화당과의 약속을 배신한 비겁한 행위였다.

우리들의 자립태세가 조금이라도 서 있다면 구태여 공사의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나, 지금 각 영의 무기를 조사해 보니 모두 녹이 슬어 있어 이를 수리하고 있는 중이다. 이 때 공사가 철병한다면 우리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3일 동안만 기다려 철수하면 그 사이에 우리들도 준비를 하겠다(<甲申日錄>, 1884년 12월 6일, 全集, 97∼98쪽).

김옥균 등이 내심 깊은 분노를 느끼면서도 간곡히 만류하여 설득하자 다케조에도 이에 승복하였다.

개화당의 신정부는 이 날부터 국정 전반에 대한 대개혁을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이 날 오후 3시에 국왕은 ‘大政維新의 詔書’를 내려 혁신정강을 기본으로 해서 신정부가 대개혁을 단행한다고 반포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측은 같은 시각인 10월 19일(양력 12월 6일) 오후 3시경에 작전을 시작하여 약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궁궐을 침범해 들어왔다.

마침 이 때에 조선-일본 사이의 우편선 千歲丸이 입항하여 일본 외무대신의 일본공사에 대한 훈령이 전달되었다. 훈령을 받아 읽은 다케조에의 손은 떨리고 얼굴은 창백하게 되었다.892)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 내용은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일본군을 조선 개화당의 정변에 절대로 가담시키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그 사이 청·불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정책을 급히 바꾸어서 다시 조선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방향의 정책으로 되돌아갔던 것이었다.

청군 1,500명의 양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조선군은 아직 응전태세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다. 모두 최신식 소총의 분해소제와 수리를 하고 있던 도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군영 전영·후영의 조선군은 구식 무기로도 용감히 응전하였다. 특히 친군영 전영 500명의 조선군은 치열하게 응전하여 전투하다가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결국 조선군은 중과부적과 무기의 열세로 패퇴하여 흩어지게 되었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응전차례였으나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을 시작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을 독려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왕비(민비)와 세자 및 세자빈은 창덕궁의 북산으로 향하였고, 왕대비·대왕대비도 뒤이어 궁문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김옥균 등이 이 보고를 받고 급히 후문으로 뒤따라가 보니 국왕도 무감과 4·5명의 병정들에게 호위되어 민비가 가 있는 북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옥균·서광범 등은 국왕을 발견하자 큰 소리로 어가를 정지시키고 국왕의 북산행차를 만류하여 다시 궁궐 안으로 모셔왔다. 개화당 장사들로 구성된 내위로 하여금 국왕을 호위케 한 후, 개화당 요인들은 긴급대책을 숙의한 결과 국왕을 보호하여 처음에는 인천을 거쳐 강화도로 가서 신정부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이 말을 듣고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죽더라도 대왕대비가 계신 곳으로 가서 자리를 같이하겠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893)

청국군이 이 때 국왕과 개화당 요인들이 있는 처소를 공격해 왔으므로 일행은 뒤쪽 언덕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 곳도 안전하지 못하여 안전한 곳을 찾다가 창덕궁 동북 궁문까지 가게 되었다. 이 때 북산에 가 있던 민비가 사람을 보내어 국왕에게 북산으로 오기를 청하였다. 국왕이 나서서 북산 쪽을 바라보니 민비는 멀리서 이를 예견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빨리 오라는 뜻의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 요인들이 국왕에게 인천으로 피신할 것을 주장했으나, 국왕은 단호히 이를 뿌리치고 그를 업은 무감의 등을 두드리며 북산에 있는 민비 쪽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박영효가 나서서 무감을 위협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김옥균은 국왕의 뜻이 확고한 것을 짐작하고 이를 만류하였다. 개화당은 할 수 없이 국왕과 함께 개화파 장사들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궁궐 건물 멀리서 기다리던 청군들이 일본군 복색을 보고 함성을 지르며 무차별 난사를 가하였으므로 국왕 옆에 있던 무감한 사람이 손에 총을 맞았다. 김옥균은 이에 무감을 시켜 큰 소리로 “대군주께서 여기 계시는데 어찌 감히 총을 쏘느냐”고 크게 꾸짖게 하니 총성이 그치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이러한 상황을 관찰하더니, 일본군이 조선국왕을 호위하는 것이 더 위험하니 일본군을 철수시킨 후 선후책을 강구하겠다고 개화당에게 통고하였다. 김옥균 등이 크게 놀라서 다케조에의 신의 없음을 힐책하고 만류했으나 다케조에는 완강하게 일본군 철수를 고집하며 강행하려 하였다.894)

개화당 요인들은 청군의 포위 속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여 국왕을 보호하지 못하게 됨은 곧 정변의 붕괴를 의미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군주제하에서는 어느 정파가 국왕을 보호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집권이 좌우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이에 대책을 숙의하고 정변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에 개화당 요인 중에서 홍영식은 신정부의 개화당 대표(좌의정)일 뿐 아니라 정변 직후에도 병정을 보내어 민비 수구파의 거물 민영익을 보호해 주었었고 청군사령 원세개와도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화는 면할 수 있다고 보고 도승지 박영교와 함께 사관생도 일부를 데리고 국왕을 호종하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개화당 요인인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다른 개화당 인사들 및 사관생도 일부를 데리고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에 망명키로 하였다.895) 이에 갑신정변에 의한 개화당의 신정부는 10월 19일 밤 붕괴되어 김옥균 등의 개화당의 집권은 ‘三日天下’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홍영식·박영교·신복모와 사관생도 박응학·정행징·윤영관·하응선·이병호·이건영·백낙운 등 7명은 국왕을 모시고 북묘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청군측이 국왕을 청군의 군영에 옮긴 후, 재판도 없이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과 7명의 사관생도들을 처참하게 살해하여 버렸다.896)

한편 국왕과 이별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유혁로·신응희·이규완·정난교 등 9명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공사관에 10월 19일 9시경에 도착하였다. 일본거류민들의 일부도 일본공사관 안으로 피난해 들어와서 일본공사관 안의 분위기는 소란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김옥균 일행이 머물러 있던 이튿날인 10월 20일에는 재집권한 민비 수구파정부의 신임 외무독판 김홍집이 일본군의 정변 가담에 항의하는 공문을 보내오고, 청군과 그 선동을 받은 수십 명의 군중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려고 일본군 보초병과 심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려고 인천으로 출발하는 다케조에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의 모든 직원과 일본군을 따라 나섰다. 우편선 천세환이 인천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공사관 직원들은 기밀문서를 태우다가 공사관 건물에 불이 번지는 것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청군과 일부 본국인들에게 추격당하면서 다케조에를 따라 인천으로 향했으며, 김옥균 일행도 그들과 함께 인천으로 떠났다.

조선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을 타도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일으킨 ‘갑신정변’은 이렇게 하여 3일 만에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892) 朴泳孝, 앞의 글, 16쪽 참조.
893)<甲申日錄>, 1884년 12월 6일(全集, 102쪽).
894)<甲申日錄>, 1884년 12월 6일(全集, 103쪽).
895) 위의 글(全集, 104∼105쪽).
896)≪甲申事變案≫중의<變亂事實>및 위의 글(全集, 10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