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2기
제2기는 1876년부터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는 1894년까지 약 18년간의 기간이다. 조선은 제2기 80년대 직전부터 西勢東漸 앞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76년에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뒤였으므로 서양제국과 무차별한 문호개방이 이루어진 변화이다. 일본과 수교한 이래 온갖 열강과 조약체결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은 1876년에 부산을 필두로 전국적으로 개항지가 개방되었다. 이로써 서울의 시전에서 지역의 포구에 이르는 우리 나라 전 지역에 걸쳐 상업·무역 등 각 분야의 민족자본 형성이 가로막히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조선의 민생과 국권은 위기에 휩싸인다. 조선은 민족위기를 극복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斥邪衛正運動과 開化運動이 일어나 富國强兵·武備自强을 수립한다.427) 1880년의 통리기무아문 설치 이후 각종 군제개편 등은 정부가 대응하려 하였던 강병책 일환이었다. 이 정책으로 서양식 신식 군악대가 설치된다. 또 문호개방으로 서양 기독교계의 찬미가, 학교의 일본과 서양노래, 각 공사관과 이들의 문화공간에서 서양음악이 문화충격으로 소통되었다.
가) 서양식 군악대 설치
조선에 서양식 군악대 설치는 두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1882년 10월 청국에 의하여 親軍右營에 銅號手 4명을 선발·훈련시킨 것이 밖으로부터 이루어진 예이다.428) 이후 청국이나 일본 그리고 러시아 등이 국내에서 정치외교적 우위성을 가질 때와 군제개편이 될 때마다 군악대 설치가 달라지고, 일제에 의하여 1907년 군대해산과 직제개편을 할 때까지 계속된다. 안으로부터 이루어진 경우는 李殷乭에 의해서다. 그는 개화당의 일원으로 1881년 日本敎導團軍樂隊에 유학하여 프랑스 악대지도자인 다그롱(Charles Dagron)으로부터 신호나팔과 코넷(Cornet)은 물론 일반군악교육 전반과 군사훈련을 마치고, 1883년에 귀국, 廣州병대에서 나팔수를 양성하였다.
나) 교회-학교를 통한 서양음악 소통
제2기의 서양음악 수용통로는 두 산맥, 곧 군대와 교회이다. 성격상 군대가 기악에 관심을 가진다면, 교회는 성악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교회를 통한 양악의 소통도 안팎의 전달자간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밖의 경우는 1885년에 들어온 미국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 등이 대표하고, 안의 경우는 徐相崙과 白鴻俊 등이 대표한다. 전자가 학교를 중심으로 영어식 찬송가를 교재로 삼는다면, 후자는 황해도 소래교회 등의 현장 교회를 중심으로 한자-한글식 찬송가를 소통시키는 데서 그 성격이 갈라진다. 1885년을 전후로 알렌부부, 헤론부부, 스크랜턴부부, 아펜젤러부부, 언더우드부부 등 국내에 들어온 미국선교사들은 당시 20대 청년들로서 청교도적 취향으로 미국 음악문화를 이식시키고 있었다. 1892년에 악보 없는 가사집<찬양가>가 최초로 발간되었다.
교회가 학교설립을 한 것도 양악 소통의 큰 산맥을 이룬다. 정부가 1898년 6월에 선교허용을 공식화하기 때문에 제2기 기간의 미선교부는 주로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적 선교를 통하여 ‘찬미가’를 보급할 수 있었다.429) 제2기에 정부가 미선교사들에게 허락한 사업은 ‘학교와 병원’이었으므로 ‘교사’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초기 선교활동은 문화적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었지만, 선교사들에게 학교는 ‘조선을 복음화시키는 도구’이었으므로, 거의 예외없이 성경과목과 ‘찬미가’를 개설하고,430) 근대지향의 양악으로 작용케 하였다.
서양음악의 통로는 또 가톨릭교회에 의한다. 1886년 5월 3일(음) ‘한불수호통상조규’가 조인되면서 가톨릭교회가 수난사를 마감하고 종교자유를 획득한다.431) 명동성당이 착공되고, 많은 학교를 세웠는데, 1893년에 가톨릭이 운영하는 사립학교가 36개교이었고, 학생수는 246명이나 되었다.432) 이에 앞선 1885년 가을에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운 이래 리우빌(Liouville, 柳達榮)신부와 마라발(Maraval, 徐若瑟)신부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신학교 교과목으로 가르쳤다.433) 1893년 藥峴聖堂 축성식 때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크레도(Credo)’ 등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공식적으로 불렀다. 한편 일반성도들이 제1기 기간 동안에 불렀던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가 ‘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형태로 계속 부른다.
다) 서양음악문화의 교류
조선이 국제간의 조약체결에 따라 조약 상대국가의 축하연주와 공사관에서 수비대들의 나팔수 활동 등 조선인의 서양문화경험은 점차 넓어진다. 1882년 5월 22일(양)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었을 때 조선의 대취타 연주보다는, 1883년 11월 26일에 조·독 조약체결을 축하하는 독일의 라이프찌히함대 군악대의 서울 외아문 공연이나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1847∼1901)의 전동 집 마당에서 연주가 부각되었다. 손탁(Antoinette Sontag)양이 민비에게 서양음악을 소개하거나, 손탁호텔과 정동구락부 등에서 주한 외교관들이 서양음악을 소통시키고 있었다. 한편 통상조약 체결로 양악기류가 유통되었다. 자동악기(mecanical instrument) 중 하나인 八音盒을 비롯한 각종 악기가 수입되고, 1884년 일본에서 수입한 물품 중 악기 45원어치도 있을 정도로 수요가 늘어난다. 1884년에 인천에 카를 볼터(Karl Wolter)가 무역회사로 설립한 세창양행에선 악기를 포함한 외국 물품을 판매하였다. 이들 악기들은 대부분 신식 군제개편에 따른 나팔수들의 악기류이다. 또≪한성순보≫도 외국의 음악문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라) 조선음악의 근대 대응
제2기는 국내적으로 관료들의 탐학이 극에 이르고 연이어 발생하는 가뭄과 토지직접 생산자이었던 농민들이 경향 각지에 火賊·水賊, 떠돌이 거지들의 流團, 才人들의 綵團들이 되어 지난 시기에 이어 출현하고 있었다. 또 군인들의 항쟁(1882)과 군제개편이나 갑신정변(1884) 등으로 국내는 정치적 변동을 겪어 갔다. 국외로는 열강들과 맺은 조약으로 경향 각지에서 개항이 잇따르며 조선사회가 격변한다. 개항장의 내국 상인들이 몰락하고, 시전과 장시 상인들이 淸·日商에 대한 점포철회 시위와 상회·상회사를 설립하여 대응했으며, 동학이 민중들과 결속해간다.
음악문화도 서양음악이 ‘힘의 언어’로 부각되어 가는 동안, 신청 조직체와 떠돌이 전문예인집단들은 안팎의 시대 격변을 버티어 갔다. 중인들의 詩社활동체인 ‘六橋詩社’가 19세기 80년대 전반까지 전승하며 근대화를 준비한다. 이 시기 전 계층과 함께 오랫동안 생활해온 ‘삼현육각패’가 계속 주도하였다. 피리(2)·젓대(대금)·해금·장구·좌고로 편성한 이 형태는 각종 연회 때 연주하는 擧床樂, 각종 춤의 반주음악, 각종 의례 현장에서의 제례악, 또는 행진음악은 물론 떠돌이 전문예인집단의 연행에 어김없이 등장하였다. 국가적인 나례행사나 耆會와 관아의 연향, 관료들의 행차, 산신제, 향교의 제향, 마을의 제사, 개인적인 연회는 물론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시나위판과 신청예술인들의 굿판, 마을의 명절놀이 때나 잔치나 그 밖의 각종 놀이나 예인집단 등의 연행과 공연에 삼현육각패가 등장하였다. 이 편성을 중심으로 풍물악기 편성도 하지만, 삼현육각 편성의 6중주는 시나위와 각종 기악중주곡에서 벌써 판소리 가락과 어울려 독주악기로 함축시키는 새로운 ‘산조시대’를 제3기에 가능케 한다.
427) | 노동은,<개화기 음악연구Ⅰ>(≪한국민족음악현단계≫, 세광음악출판사, 1989), 103∼14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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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 ≪親軍右營都案≫(장서각 도서번호 2-609);≪親軍別營謄錄≫, 무자 5월 19일. ≪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개국 503년 갑오 10월 29일. ≪摠禦營謄錄≫(장서각 도서번호 1411-30-1-9), 신유 3월 3일;≪敎導所出駐將兵成冊≫등 참조. |
429) | ≪韓國外交文書≫11권, 美案 2, 242쪽. |
430) | 학교의 校史들은 ‘唱歌’ 이름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당시에 일반화되지 않은 용어이다. 1906년 ‘보통학교령’과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을 제정할 때 ‘唱歌’ 교과목이 처음으로 공식화되었다. |
431) | 崔奭祐,<韓佛條約과 信敎自由>(≪韓國敎會史의 探究≫, 韓國敎會史硏究所 出版部, 1982), 187∼207쪽 참조. |
432) | 盧吉明,<迫害期·開化期의 韓國天主敎會와 社會開發>(≪韓國天主敎會創設二百周年紀念, 韓國敎會史論文集≫Ⅰ,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197∼199쪽. |
433) | Compte Rendu de la Societé des M. E. P,≪빠리외방전교회 연말보고서:1878∼1894≫. 한국교회사연구소,≪敎會史硏究≫4 중 자료, 1890년도 보고서, 253∼25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