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계림동지회
1940년대 개별 단체로 오사카에서 조직된 재일조선인 민족운동단체인 鷄林同志會895)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련의 회합에서 김봉각·김병목·강금종·고봉조·한만숙 등은 민족의식을 서로 확인하고, 5월 초 金城製作所에서 “조선청년이 나갈 길은 오직 하나,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데 있을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독서회를 갖고 상호수양하며 실력의 앙양에 노력하기로 하여 흥아연구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수차례 회합하여 조선독립의 이론과 실체에 관해 연구를 계속했는데, 국내외 정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사회주의 이론 학습을 줄기차게 수행했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론의 교과서격인 河上肇의≪貧乏物語≫를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흥아연구회는 1940년 5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 내의 정세가 점차 쇠퇴한다는 인식 아래 김봉각의 주창하에 발전적으로 해소되었고, 같은해 5월 26일 새롭게 비밀결사로 조직되었다. 이것이 계림동지회였다. 이렇게 계림동지회원은 투쟁 속에서 단련되어 새롭게 조직을 결성했던 것이다.
계림동지회는 5월 26일 모임에서 조직의 결성과 함께 다음의 행동방침을 결의했다. ① 현하 긴박한 국제정세에 즈음하여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해 조선 독립을 탈환하도록 만전을 다할 것, ② 조선독립운동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지의 공고한 결합을 급무로 함. 동지의 결집에는 우선 인텔리겐차를 획득해서 지도체를 확립 강화할 것, ③ 마르크스주의·삼민주의를 중심과제로 연구할 것, ④ 당면 日本大學·오사카專門學校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학내 구성원의 획득에 매진할 것.
계림동지회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강령·규약 등을 작성하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주요 활동의 내용을 보면, 첫째 조선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을 전개했다. 둘째로 조직강화를 도모했다. 특히 조직위원회에서 잡지회람소를 개설하여 동지의 획득에 노력하기로 하고 김봉각이 그 책임을 맡기로 했다. 이후 김봉각은 자신의 집에 흥아잡지회람소를 설치하여 독자망의 확충을 도모하여 십수 명의 회원을 획득했다.
계림동지회는 민족해방운동이 침체되었던 전시하에도 불굴의 의지를 갖고 이론 학습과 조직적 강화를 통해 제국주의 일본에 끝까지 반대했던 것이다.
방향전환을 통해 새로운 지형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한 1930년대 이후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일본 사회운동으로부터 독자성을 갖기도 했다. 지역사회의 운동과 개별적인 형태로 전개된 193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은 일본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특히 만주나 중국관내지역의 경우 비슷한 내용들이 있다. 이 시기의 민족해방운동의 경우 민족문제와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한 문제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 투쟁의 주요한 계기가 된 점은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896)
1930년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1920년대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운동의 지형이 달라졌고, 이에 대응하는 조선인의 태도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강화되는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시위를 통해 단기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조선인들은 인식했고, 장기적인 전망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특징을 들면, 첫째 운동지형의 변화, 둘째 운동양상의 변화, 셋째 독자적인 지역운동의 존재, 넷째 투쟁의 단절성, 다섯째 대중추수주의적인 경향성 등이다. 이와 함께 부분적이지만 조·일연대가 고민되고, 부단히 현실투쟁에서 그것이 실현되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반제적인 성격을 띠며, 동시에 지역적 특수성에 기초하여 독자성을 갖고 전개된 반일투쟁이었다.
<金仁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