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조선 사회6. 문화의 새 기운

(4) 신앙의 새 경험과 사회의 동요

도교와 도참 신앙

조선 중기에, 사림에 의하여 이단으로 배척되어 밀려난 도교와 도참 신앙은 선조, 광해군 때에 이르러 일부 재야 지식인 사이에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도인들은 환인, 단군을 우리 나라 도파(道派)의 지조로, 김시습을 중조로 각각 내세우면서 점차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여 갔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도맥 전승을 적은 해동전도록이 17세기 초에 작성되었고, 역시 같은 시기에 조여적은 은둔 생활을 하던 도인들의 행적을 모아 청학집을 펴냈다. 도인들은 도참 신앙이나 민간 설화를 신봉하여 명과 청의 교체를 예언하고, 조선 왕조의 몰락을 내다보면서, 성리학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보였다.

도인들의 학문은 깊이 있는 이론적 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또한 미신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여 그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일반 서민들에게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도교와 관련된 예언 사상은 각종 비기, 참서로 반영되어, 정감록, 토정비결 등이 널리 민간에 유행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학, 예술은 도교와의 깊은 관련 위에서 전개되어 각종 야담, 패설, 소설을 낳고, 민화(民畫)의 발달을 가져왔다.

또한, 도교의 주기 사상은 조선 후기 철학 사조에 있어서 경험론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860년대에 성립된 동학은 이러한 사조가 평민적인 입장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천주교의 전래

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 문화가 전해지는 가운데 천주교가 들어왔는데, 서학(西學)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학은 처음에 신앙으로서 받아들여졌다기보다는 서양 학문의 일부로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서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북인 계통의 학자들이었다. 허균은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같은 때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맛테오릿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불교와의 차이점을 언급하였다.

이수광과 비슷한 시기에 유몽인은 그의 어우야담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유교, 불교, 도교와의 차이점을 논하기도 하였다.

뒤에 청에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 세자는, 뻬이징에서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사귀고 돌아오는 길에 천주교 서적과 그 밖의 서양 서적 및 과학 기구 들을 얻어 왔으며, 그보다 훨씬 앞서 정두원도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파 학자들과 북학파 학자들은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는데, 그 중의 일부는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등은 천주교를 신봉한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유교의 근본 윤리인 효⋅충을 바탕으로 하여 크리스트 교의 구세 복음(救世福音)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참신한 윤리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인, 평민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

천주교는 이렇듯,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문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주체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신자가 늘어 갈수록 천주교 자체의 한계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즉, 천주교에서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전례(典禮), 특히 제사 의식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천주교의 전파를 무제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이에 정부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고, 뻬이징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을 금하였으며, 또한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신도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남인을 우대하고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썼기 때문에 커다란 탄압은 없었다.

정조가 돌아가고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탄압이 내려졌는데, 이것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 한다. 이 때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 학자와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사형을 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유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실학도 급속히 쇠퇴되었다. 이 때, 남인파 신자 황사영은 뻬이징의 서양인 주교에게 신유사옥의 전말을 보고하고, 열강이 해군 병력을 동원하여 정부를 위협해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서한을 비단에 써서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동학의 발생

세도 정치 밑에서 고통받던 대다수 민중은 그들의 무계획적인 민란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는 경험을 되풀이하는 가운데서, 점차 민중을 위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동학(東學)이다.

동학을 먼저 제창한 사람은 경주의 향반 출신인 최제우였다. 동학은 그 후 최시형 등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그 교리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결집되어 널리 선전되었다.

동학 사상은 이미 서민에 대한 지도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성리학과 불교를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과 연결되어 있던 천주교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서학(천주교)을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동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학 사상은 전통적인 민족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도 일부 흡수한, 종합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특히, 철학으로서의 동학은 주기론(主氣論)에 가까왔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은 샤아머니즘과 도교에 가까와 부적과 주술을 중요시하였다. 사회 사상으로서의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를 지향하고, 하늘의 운수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동학은 운수가 끝난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혁명 사상을 내포하였고, 보국 안민을 내세워 서양과 일본의 침투를 배척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동학이 창도되자, 이에 따르는 신도가 모여들어 삼남 일대에 퍼졌고, 포(包), 접(接) 등의 교단 조직이 이루어져 갔다.

동학도의 세력이 날로 번성하여 가자, 정부에서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민중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조 최제우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제2세 교주 최시형이 충청도 보은을 근거로 동학을 계속 퍼뜨렸으므로, 그 세력은 갈수록 뻗어 갔다.

농촌 사회의 동요

18세기, 영⋅정 시대의 국왕과 중소 지주 출신 실학파 관리의 협력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개혁 정치는, 대지주 양반의 거센 반발로 미봉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고, 얼마 안 가서 다시 대지주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문벌 정치로 변질되었다.

순조, 헌종, 철종 등 나이 어린 임금이 잇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극도로 약화되어 드디어 정권은 왕의 외척의 손에 넘어갔다. 이른바 세도 정치(勢道政治)라고 불리는, 타락된 노론 계열의 문벌 정치가 시작되어 6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세도가의 일족은 요직을 독차지하여 국가를 마음대로 요리하였으며, 뇌물 거래와 매관 매직 등 부정 행위를 자행하여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와 같은 중앙 정치의 부패와 타락은 그대로 지방 정치에도 파급되어, 지방 관리와 향리는 권력을 악용하여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그들은 법률에도 없는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었으며, 양민을 잡아다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한 다음에야 풀어 주는 풍조까지 생겼다. 국가 재정의 근간이 되는 삼정은 지방관의 사복을 채우는 수단으로 바뀌다시피 되었다.

군포에 있어서는 인징(隣徵), 족징(族徵), 백골 징포(白骨徵布), 황구 첨정(黃口簽丁) 등이 더욱 성행하고, 환곡에 있어서는 부정 행위가 보다 두드러져 삼정 중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 지방관과 향리의 부정, 부패를 목격한 실학자 정약용은, 타락한 이도(吏道)를 바로잡기 위하여 목민심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지방관의 비행을 단속하기 위하여 암행 어사를 수시로 파견하였으나, 도도히 흐르는 탁류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균역법과 대동법의 시행으로 중농 정책이 강조되어 다소 기운을 되찾았던 농촌 경제가 다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관리의 수탈 말고도,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도 전보다 늘었다. 그리하여, 가난에 쪼들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마침내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 걸식하거나, 세금을 물지 않는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화적(火賊)이라 불리는 도적 떼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었다.

민란의 발생

악정으로 곤궁에 빠진 백성들은 불만과 분노를 품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탐관 오리에 대한 반항과 민중의 자각 운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민중의 불만이 처음에는 학정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이나 탐관 오리를 비방하는 벽서 같은 형태로 나타났으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민란(民亂)으로 확대되었다. 더우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흉년이 들고 전염병마저 유행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순조 때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철종 때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소요 사건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가산에서 홍경래, 우군칙 등 중소 지주 출신인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이 중심이 되고 광산에 모여든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으로서, 선천, 정주 등을 점거하고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진주 민란은 탐관 오리와 토호(土豪)에 반항하여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서,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죽창으로 관청을 습격하였으며, 지주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전라도의 함평, 익산, 충청도의 공주, 경상도의 개령 등 삼남 지방은 물론, 북쪽 함흥으로부터 남쪽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민란이 파급되어, 전국이 몹시 소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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