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읍
제목 | 국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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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國邑 |
유형 | |
시대 | 삼국 이전 |
관련국가 | 삼한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삼한(三韓)을 구성하는 소국(小國)의 정치⋅군사적 중심 읍락(邑落).
[내용]
삼한은 여러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한(馬韓)은 50여 개 소국으로 구성되었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는 각각 12개의 소국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 소국들이 산재해 있었다. 삼한의 소국들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 성립되기 시작하여 초기 철기 시대에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국은 중심이 되는 읍락인 국읍(國邑)과 여러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다. 국읍은 처음에는 일반 읍락이었지만, 여러 읍락이 결합하여 정치 집단을 형성하면서 중심지로 성장한 곳이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여러 읍락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 집회소가 설치되면서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고, 주변의 정치 집단과 무력 대립이 발생하였을 때 대피하거나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면서 군사적 중심지가 되었다.
또 소국 내부에서 정치⋅군사적 역할을 담당하는 지배층과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으로 계급 분화가 일어나면서, 지배층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가 중심 읍락, 곧 국읍에 형성되었다. 나아가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소국을 대표하는 정치적 통솔자가 등장하는데,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으로 불렸다.
지배층의 거주지인 국읍에 재화가 집중되고 그 재화의 유통⋅분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읍은 경제적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다른 소국 및 정치 집단과의 교역이나 교섭 역시 국읍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농경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제천 행사와 같은 종교 행위 역시 국읍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국읍은 소국을 구성하는 여러 읍락 중 지배층이 거주하는 정치⋅군사⋅경제⋅종교적 중심 읍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가 정치⋅군사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삼한에서는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소도(蘇塗)가 따로 존재하였으며, 제천 행사와 같은 종교 행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도 있었다. 이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었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읍은 하천을 끼고 있거나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아 주변을 관찰⋅감시하기 좋고 방어하기도 용이한 입지 조건을 가졌다. 또 목책(木柵)이나 환호(環濠)와 같은 방어용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흙으로 성벽을 쌓은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관련자료
- ㆍ국읍(國邑)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삼한의 사회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