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과
제목 | 현량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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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賢良科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기묘천과(己卯薦科), 천거과(薦擧科), 천과(薦科),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 |
별칭•이칭 |
[정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선발한 과거 시험.
[내용]
조선 시대 관리 임용 시험인 과거는 경서의 내용을 강론하는 강경(講經)과 글짓기인 제술(製述) 과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만으로는 학문과 덕행을 두루 갖춘 인재를 뽑기 어렵다는 비판이 항상 제기되었다. 조선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국왕의 신임을 얻고 난 이후 이와 같은 사실을 열거하고, 새롭게 천거를 통한 인재 등용 방식을 제기하였는데, 그것이 현량과이다. 현량과라는 명칭은 중국 한나라 때 추천을 통한 인재 선발 방식인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에서 따 온 것이다.
중종은 조광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1519년(중종 14) 경서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인재를 천거하게 한 후 현재 조정의 시무(時務)에 대한 책문만을 시험하여 관리로 임용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20명의 후보 중 김식(金湜), 박훈(朴薰) 등 28인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중 다수가 조광조 등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사되고 기묘사림이 실각하면서, 현량과 역시 파방(罷榜)되었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 이후 사림파가 정국을 장악하면서 이들에 대한 파방 조처가 철회되었다. 이후 추천을 통한 인재 선발의 필요성이 여러 차례 건의되었으나, 결국 현량과는 복설되지 못하고 중종 대 단 1회만 시행된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다만 조선 후기에는 현량과와 산림(山林) 등용의 제도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 관련자료
- ㆍ현량과(賢良科)
- 사료로 보는 한국사 국문: 기묘사화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현량과 실시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사림의 성장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사림의 정치적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