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
제목 | 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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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後市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후시 무역(後市貿易) |
별칭•이칭 |
[정의]
조선 시대 중국, 일본과의 공식적인 무역 외에 열린 비공식 상업 거래.
[내용]
조선은 중국,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양국의 협의에 따라 공적으로 시장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시장을 개시(開市)라고 한다. 후시는 개시와 달리 비공식적으로 양국 간에 이뤄지는 상업 활동을 통칭한다. 사신이 국경을 출입할 때에 국경에 인접한 도시의 상인들이 역관(譯官)이나 지방의 관리와 결탁하여 상업 활동을 했다.
중국과의 후시는 의주, 개경 등의 도시에 거점을 둔 상인들이 활발하게 참여했다. 중강 개시, 회령 개시, 경원 개시와 같은 종래의 합법 개시(開市) 무역이 대체로 해마다 두 번씩 열리는 정기적인 것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후시가 나타났다.
후시 무역은 사행(使行)이 있을 때도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책문 후시는 청나라의 외교 관문인 책문(柵門)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을 일컫는다. 조선에서는 보통 중국에 가져가는 세폐(歲幣)를 싣던 말이 의주와 책문 사이에서 죽는 것에 대비해 빈 말을 보냈다. 이에 사절과 상인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 빈 말을 이용해 화물을 싣고 책문에서 돌아오면서 무역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빈 말을 여마(餘馬)라 하였기 때문에 이 무역을 여마 교역(餘馬交易)이라고 한다. 따라서 후시에서 실제 교역되는 양은 공식적으로 추산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실제 청과의 후시는 왕래하는 사신이 증가하면서 한 차례에 거래되는 양이 은으로 10만 냥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었다. 북경에서 조선의 사신단이 머무는 장소인 회동관에서도 사신단의 수행 인원들은 중국 예부가 관리 감독하는 회동관 개시와 별도로 무역을 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교역 중에도 부산의 왜관(倭館)에서 이루어지는 개시 외에 상인들이 불법적으로 교역을 진행하였다.
후시는 처음에는 개시를 이용한 불법적 교역이었으나 횟수와 무역량이 개시에 비해 오히려 커졌다. 이에 조선 정부가 후시를 인정하고 무역 물종에 과세하기 시작하면서 후시는 더 이상 불법적 행위가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