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박해
제목 | 기해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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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己亥迫害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프랑스 |
유의어 | 기해사옥(己亥邪獄), 기해교난(己亥敎難) |
별칭•이칭 |
[정의]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두 번째 천주교 박해 사건.
[내용]
천주교는 17세기 초반 중국으로 간 조선 사신들에 의해 처음 조선 땅에 알려졌다. 18세기 후반 천주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천주교를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였지만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박해까지 가하지는 않았다. 정조 사후 벽파(僻派) 정권 아래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체제 위협 제거와 반대파 숙청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1801년(순조 1) 일어났던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에 관용적인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이 중심이 된 시파(時派)가 정권을 잡으면서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박해는 풍양 조씨 세도 가문이 중심이 된 벽파(僻派)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금 큰 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839년 3월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같은 해 10월까지 지속되었다. 이때 프랑스인 선교사로 왔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효수(梟首)되었다. 현석문(玄錫文)의 『기해일기』에는 54명이 순교했고, 장살(杖殺)되거나 병사(病死)한 사람이 60여 명이라고 전한다. 박해는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특히 서울⋅경기 지역에서 많이 발생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와 달리 천주교인 처단 상소가 빗발치지도 않았다. 또 이전 신유박해나 이후 병인박해에 비해 박해 기간이 짧았고, 체포된 신자의 수도 더 적었다. 이를 통해 기해박해는 신유박해가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었던 것과 달리 체제 수호의 성격이 더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 천주교가 유입된 것은 단지 새로운 종교가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기존의 신분 질서를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체계였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기해박해는 사회적 탄압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면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희생되었지만 이후로도 천주교는 지하로 숨어들어 계속 널리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