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파
제목 | 시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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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時派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조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때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정치적 처분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나누어진 정파(政派)로 정조의 탕평 의리를 따르는 무리.
[내용]
영조 말년 외척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에 반발하며 노론 청류(淸類)를 자임하며 비밀 결사 형태로 결집했던 청명당(淸名黨) 세력은 정조가 강경한 입장의 사람들을 등용하는 준론 탕평책을 씀에 따라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때 정계에 진출한 노론 청류들은 정조 연간 시파와 벽파로 분열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분열 시점은 논란이 많으나 대개 정조 재위 전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돌출된 것은 1788년(정조 12)이다. 시파는 정조의 탕평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정국을 주도하여 나갔는데, 이에 반발하는 벽파가 이들을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비판하면서 ‘시파(時派)’ 혹은 ‘시배(時輩)’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그에 비해 자신들은 궁벽하게 의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스스로 ‘벽파(僻派)’라고 하였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벽파와 크게 대립하였다. 특히, 1792년(정조 16)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에서 충돌하였다. 영남의 유생들이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사도세자에게 죄를 씌운 무리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파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시파는 사도세자 신원을 통해 정조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벽파는 영조가 정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때의 대치 국면은 탕평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줄 정도로 대규모 당쟁으로 확대되었지만 시파와 벽파의 화해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시파와 벽파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정조 연간이 아니라, 순조 연간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定順王后)와 손잡은 벽파가 반대파인 시파를 국가를 전복하려는 사학 죄인, 모반 죄인이라며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1805년(순조 5) 정순왕후 김씨의 사망 이후 벽파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끝났다.
▶ 관련자료
- ㆍ시파(時派)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전례 논쟁-진산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