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화론
제목 | 주화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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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主和論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청(靑) |
유의어 | 화의론(和議論) |
별칭•이칭 |
[정의]
전란 중에 현실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국과 화친을 해야 한다는 주장.
[내용]
주화론이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적국과 화친을 통해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화론은 적국과의 운명을 건 결전을 주장하는 척화론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뚜렷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즈음하여 조선은 청나라와 기존의 화친 관계, 곧 정묘호란 직후 청의 전신인 후금(後金)과 맺은 화약에서 양국을 형제의 나라로 정의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을 뿐, 주화론과 척화론이 대립하는 시점에도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는 주화론자 역시 일치되어 있었다.
주화론자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서 공을 세운 반정공신(反正功臣)들로 일반 사림(士林)들에게 특권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들은 의리의 관철보다는 현실적 피해를 줄이는 데 주력했다. 주화론을 대표하는 최명길(崔鳴吉)은 후금(後金)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여 극단적 대결을 피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전란이 발발한 후에는 청군에 비해 조선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종묘사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화할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였으며 항복에 이르는 대부분의 과정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화론자라고 해서 명에 대한 사대 의리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패배 이후에도 청나라의 징병 요구를 거부하면서 명나라와 비밀리에 외교 관계를 지속하여, 청나라에 끌려가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기간에 벌어진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은 사실 국제적 역학 관계나 전쟁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성리학적 지배 질서가 강화되면서 백성과 국가의 안위를 강조하는 현실적인 주화론은 배척되고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척화론은 반청론, 북벌론으로 이어지면서 지배적인 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다.
▶ 관련자료
- ㆍ주화(主和)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후금에 대한 주화론
- ㆍ주화론(主和論)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후금에 대한 주전론
- ㆍ주화파(主和派)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인조 반정과 친명 배금 정책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후금에 대한 주화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