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부인회
제목 | 진명부인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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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進明婦人會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대한제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07년 4월 여성 교육을 위해 설립된 여성 단체.
[내용]
진명부인회는 박영인(朴泳仁), 민현자(閔玄子), 이미경(李美卿) 박영자(朴英子) 등의 발기로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여성 교육과 여공(女工) 양성을 위해 1907년 4월 설립되었다. 찬양회와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등 기존의 부인 단체들이 남성들에 의해 설립되고 주도되었던 것에 반해, 진명부인회는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 운영되었다.
진명부인회는 1907년 4월 23일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임원을 선출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총재에는 황귀비(皇貴妃) 엄씨(嚴氏), 회장에는 신소당(申簫堂), 총무에 박영자가 선출되었고, 회원은 약 100~200명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명부인회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모범적 여성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 교육 운동을 펼쳤다. 부인회는 여성 교육 증진을 위해 양규 의숙(養閨義塾)을 맡아 운영하고자 했다. 양규 의숙은 여자교육회에 의해 1906년 5월에 설립된 여성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설립된 지 반 년도 되지 않아 여자교육회가 운영을 포기하면서 양규 의숙은 재정 악화로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진명부인회는 여자교육회가 친일 단체로 변질되자 불만을 품고 탈퇴한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기 때문에 여자교육회에서 운영하던 양규 의숙 역시 인수했던 것이다.
사실 진명부인회 역시 설립 초기 부족한 재정으로 인해 회관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학교를 빌려 개회하였다. 그런데 총재를 맡은 황귀비의 지원을 받아 회관을 마련하였고, 양규 의숙 역시 이 회관에서 다시 교육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명부인회는 회장 신소당이 사퇴하면서 1907년 9월 이후 활동이 위축되었고 이후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