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북 흥학회
제목 | 한북 흥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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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漢北興學會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대한제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06년 10월 함경도 지역 지식인들이 창립한 계몽 운동 단체.
[내용]
한북 흥학회는 1906년 10월 29일 함경도 출신의 오상규(吳相奎), 이준(李儁), 설태희(薛泰熙), 유진호(兪鎭浩), 이동휘(李東輝) 등의 발기에 의해 70여 명의 회원으로 설립되었다. 학회의 설립 목적은 관북 지역, 즉 함경도 지역민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한북 흥학회는 서울에 중앙회를 설치하였는데 회장 1명, 부회장 1명, 평의원 20명, 간사원 10명, 서기 2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1908년 1월 한북 흥학회가 서북 학회에 통합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중앙회는 성립 직후 직접 한북 의숙(漢北義塾, 漢北學校)을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펼쳤다. 또 각 지역에 지회와 지교(支校)를 설치하여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 계몽 운동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회와 지교 설립 노력은 크게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중앙회가 중심이 되어 활동을 펼쳤다.
한북 흥학회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범 학교인 한북 의숙을 설립, 운영하여 신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였다. 학회는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신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신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겨 사범 학교를 설립했다. 둘째, 강연회, 토론회, 연설회, 운동회 등을 통해 일반 민중들에게 애국심, 민족의식, 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또한 국권 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 설립 등 교육 운동을 촉구했다. 셋째,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의 주체는 국민이며, 그중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 청년층이라는 인식 속에서 청년들을 계몽 운동의 지도자로 양성하기 위한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 운동은 한북 흥학회원과 서우 학회원이 함께 발기하여 1907년 3월 17일 창립한 서북학생친목회를 통해 전개되었다.
한북 흥학회는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계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평안도, 황해도 인사들 중심의 서우 학회(西友學會)와 통합하여 1908년 1월 서북 학회(西北學會)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