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제목 | 신한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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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新韓村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러시아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한인(韓人) 이주민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건설한 한인 촌락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
[내용]
러시아령 연해주로의 한인 이주(移住)는 18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인 이주자들은 무리 지어 정착할 마을을 세웠는데, 최초의 한인 정착지로 알려진 곳은 중국과 연해주 국경 부근에 위치한 지신허(地新墟)라는 지역이었다. 이어서 연해주의 추풍(秋風) 지역으로 한인 이주자들의 거주지가 점차 확장되어 갔다. 특히 1869년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부 지역에 닥친 극심한 흉년은 굶주린 백성들의 월경 이주를 더욱 촉진하였다. 그 결과 1860년대 후반 이후 다양한 크기의 한인 촌락들이 연해주 각처에 만들어졌다.
그중 블라디보스토크의 경우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군항 건설과 함께 한인 이주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시내 중심가에 개척리(開拓里)라는 한인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시내 중심가의 한인 촌락을 콜레라 근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강제로 철거하고, 러시아 기병단의 병영지로 사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서북쪽 변두리로 옮겨진 한인 이주민들은 그곳을 신개척리(新開拓里)라 부르며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하였다. 이 신개척리에 새롭게 형성된 한인 촌락을 ‘신한촌’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어로는 ‘까레이스까야 슬라보드카(한인 촌락)’라고 했다.
신한촌이라는 명칭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동일한 이름의 한인 촌락은 블라디보스토크 외에도 연해주 및 간도 지역에서도 드물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인 이주자들이 간도와 연해주 전역에 걸쳐 무수히 많은 한인 촌락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인 촌락을 기반으로 연해주 등지에 한인들의 집단 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독립운동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 관련자료
- ㆍ신한촌(新韓村)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동포들의 국외 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