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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운동

제목 5⋅4 운동
한자명 五四運動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오사 운동(五四運動)
별칭•이칭

[정의]

1919년 5월 4일 중국 베이징에서의 학생 시위를 계기로 일어난 중국의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 운동.

[내용]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 일본은 산둥 반도(山東半島)를 점령하고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남만주 일대의 기존 이권을 연장하고 산둥 지역의 새로운 이권을 요구하는 ‘21개조’를 제출하여 관철시켰다. 종전 후 1919년 중국은 승전국으로서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산둥 지역의 이권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 등과 중국에 대한 여러 이권을 상호 승인하기로 합의하면서 회의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갔다. 결국 4월 21일 회의에서 일본 측 주장이 승인되었고, 산둥 이권을 일본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4월 30일 회의 결과가 중국으로 전해지자, 이에 분노한 각 대학교의 학생 대표들이 5월 1일 베이징대학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5월 4일 아침 13개 지역 전문학교와 대학의 학생 대표들이 5개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결의안은 첫째, 파리 강화 회의에서 결정한 산둥 해결 방안에 반대할 것. 둘째, 전국의 대중에게 중국이 처한 어려움을 일깨울 것. 셋째, 베이징 인민대회를 제안할 것. 넷째, 베이징 학생 연합의 결성을 촉구할 것. 다섯째, 베르사유 조약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것 등이었다.

학생들은 결의안을 곧 실행에 옮겼다. 당일 오후 3천여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天安門)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군경과 충돌했고,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차오루린(曺汝霖)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베이징 정부는 학생 32명을 체포했으나 이후에도 시위 운동은 계속되었다.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루쉰(魯迅) 등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정부에 대항했고, 반대 운동은 톈진(天津)과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었다.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은 베이징 학생 연합을 결성했고, 6월에는 중국 전역의 학생 연합 대표들이 중화민국 학생 연합을 결성하였다. 학생 시위자들은 ‘구국10인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전국에서 산둥 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열고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는 등 그들의 메시지를 중국 전역에 알리는 데도 성공했다. 일본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상하이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장 폐쇄가 일어났다. 파업으로 외국 자본 계열의 공장들도 멈춰 서자 열강들은 운동을 제지하라고 중국 정부에 요구하였다. 중국 정부는 학생 운동을 탄압하면서 파리의 대표단에게 조약 조인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미봉책으로 대중의 성토 대상이었던 친일파 차오루린과 장쭝샹(章宗祥, 주일 공사) 등을 6월 10일 파면했다. 그러나 강화 조약 조인 거부에 대한 시위는 계속되었고, 이에 부담감을 느낀 파리의 중국 대표단은 6월 28일 베르사유 강화 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신해혁명 이후 크게 성장한 지식인과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의 광범한 대중들이 참가하여 전개된 5⋅4 운동은 중국에서 반제국주의 운동 전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운동 기간 중 수많은 정기 간행물과 신문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들 언론 매체들은 반일 주장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 사상과 봉건적 관습에 대한 비판, 민주주의와 근대 사회 이념과 체제, 더 나아가 사회주의와 사회 혁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백가쟁명식(百家爭鳴式)으로 논의하면서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수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러한 5⋅4 운동을 통한 대중의 성장과 청년⋅학생 운동의 확산, 사상의 해방 분위기는 사회주의 사상 및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관련자료

ㆍ5⋅4 운동(五四運動)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