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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회의

제목 워싱턴 회의
한자명 Washington會議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미국
유의어 워싱턴 회의(The Washington Conference), 워싱턴 군축 회의(Washington軍縮會議), 태평양 회의(太平洋會議), 태평양 군축 회의(太平洋軍縮會議)
별칭•이칭

[정의]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회의.

[내용]

워싱턴 회의는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9개국 대표단이 모여서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한 국제회의였다. 1921년 7월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열국(列國) 간 회의를 제안하였다. 이 회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서로의 권익을 보장하는 가운데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워싱턴 회의를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 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였다. 한국은 워싱턴 회의에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임시 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여 서재필(徐載弼), 정한경(鄭翰景), 돌프(Fred A. Dolph)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이승만은 대표단장으로 임시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워싱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회의의 의제로 선정되도록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한국 대표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워싱턴 회의 의제에서도 한국 문제를 완전히 제외시켰다. 결국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독립론’은 파리 강화 회의와 마찬가지로 워싱턴 회의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워싱턴 회의의 실패로 외교독립론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한 이승만은 임시 정부에서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외교를 통한 한국 독립이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이를 전제로 상하이에 수립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재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국민 대표 회의 소집 주장이 대세를 얻어갔고, 재편의 방향을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 등 치열한 내부 논쟁이 전개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