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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일본인

제목 재조일본인
한자명 在朝日本人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76년 개항부터 1945년 일제가 패전할 때까지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

[내용]

1876년(고종 13)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때까지 한반도에는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1876년 개항 당시 부산에 있던 일본인은 54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879년 원산 개항과 1880년 원산의 일본 영사관 개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일본 조계(租界)의 설정, 그리고 같은 해 한성(서울)의 개방 등으로 차츰 증가해 갔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는 4,356명, 청일 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는 9,354명이 되었다. 러일 전쟁 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통감부를 두고 각지에 이사청을 설치한 뒤부터 일본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1905년 말 42,460명, 1906년 말 83,315명이었고, 강점 직후인 1910년 말에는 171,543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재조일본인은 1919년에는 346,619명, 일본이 패전한 1945년에는 약 80만 명에 달했다. 재조일본인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에 앞장섰고, 한국이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정치와 문화, 경제와 사회 모든 방면에서 식민지 지배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한국인과는 다른 자신들 특유의 생활 의식과 문화, 정신 구조를 공유하면서 ‘풀뿌리 침략자’로서 기능했다.

재조일본인 사회는 대체로 한국인과 접촉이 별로 없는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70% 이상의 한국인들이 농민으로서 농촌에 거주했던 것에 비해 일본인 절대 다수는 대도시와 지방 주요 도시에 거주했다. 도시에서도 일본인은 별도의 구분된 지역에 살았다. 서울의 경우 일본인들은 남산 아래 현재의 예장동, 남산동, 필동, 명동, 충무로에 주거지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들이 살던 청계천 이남인 남촌의 거리는 가로등과 도로 포장 등의 시설이 확충되었고, 은행과 백화점 등이 들어서며 번화가로 변모했다. 그러나 한인들이 살던 거리는 그러한 시설이 갖춰지지 못했다. 시가지는 개발된 중심부의 일본인 거주지와 빈곤한 한국인이 사는 거주지로 이원화되었다. 그 안에서 제한된 범위의 상호 접촉이 이뤄졌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교육에서도 철저히 차별되어 교육되었다. 일본 아이들은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녔지만, 대부분 한국 아이들은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극소수의 한국 아이들만이 중학교에 갔다. 때문에 도시에 거주하는 대다수 일본인 아이들은 태어나서 교육받고 살아가면서 한국인과 접촉이 제한된 채 자랐고, 자란 뒤에도 ‘작은 일본’을 만들어 모여 살았다.

재조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비해 월급에 가봉이 더해져 두 배가 되는 임금을 받으며 경제적 혜택을 누렸고, 이를 통해 더 나은 교육과 상대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은 한반도에 살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와 문화, 한국인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여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을 보고, 일상생활에서 조선인들을 ‘요보’라고 지칭했다. 이는 당시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을 대변하는 용어 중 하나였다. 한국 사회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대다수 재조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은 열등한 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한편 이들은 민족적으로는 식민 모국에서 넘어온 지배 민족이지만, 법제상으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외지인(일본 거주민은 ‘내지인’으로 칭함)이었다. 일제는 제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 일본 본토인 내지와 식민지인 외지를 구별하여 차별했다. 외지인에게는 참정권, 곧 일본 중의원 의원과 귀족원에 대표를 보낼 수 있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일부 재조일본인들은 참정권 청원 운동이나 한반도에 식민지 자치 의회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는 자치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재조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귀환 과정에서 38선 이북에서는 일본인 송환이 계획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많은 일본인이 수용소 등지에서 겨울을 보내다 2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귀환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1947년에는 대체로 완료되었다. 그런데 이들 귀국한 재조일본인들은 외지 출신이라고 본국 일본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기도 했다. 또 일본 사회는 이들의 귀환 과정에서의 피해를 거론하며 ‘전쟁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재조일본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풀뿌리 침략자’로 살았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도리어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많은 경우 식민지 한국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한 채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험을 아름답게만 기억하거나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