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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제목 자유시 참변
한자명 自由市慘變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러시아
유의어 흑하 사변(黑河事變), 아무르 사변(Amur事變)
별칭•이칭

[정의]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에서 일어난 무장 충돌 사건으로 한국 독립군 약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

[내용]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고 수천 여명의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간도참변(경신참변)이 일어났다. 간도의 독립군들은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군 정규 부대와의 정면 대결보다는 군사 역량을 보존하고 독립 투쟁의 장기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흑룡강성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밀산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다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며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흑룡주(黑龍州)자유시로 이동했다. 당시 극동 지역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한인 무장 부대들도 단일한 대부대를 편성하기 위하여 자유시로 집결하고 있었다. 집결한 무장 세력의 수는 4,000여 명 이상을 헤아렸다.

그런데 1921년 3월 하순 자유시에 집결한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부대들은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상해파 고려 공산당 계열의 대한 의용군(사할린 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고려혁명군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양자는 재러시아 한인 무장 부대들의 지휘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한편 자유시로 이동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는 대한 의용군과 제휴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재러시아 한인 군대의 관할권이 극동공화국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되면서 상황은 고려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두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두 세력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칼란다리쉬빌리는 대한 의용군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대한 의용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대한 의용군에 대한 무장 해제에 착수하였다.

6월 28일 오전 1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극동공화국 자유시 수비대와 교섭하여 러시아 적군 4개 중대를 차출하였고, 여기에 고려혁명군이 가세하여 대한 의용군의 주둔지인 수라제프카로 진격하였다. 6월 28일 고려혁명군은 수라제프카를 포위하고 대한 의용군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부대 지휘권 양도를 거부한 한인 독립군 부대들도 같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 그 결과, 대한 의용군과 한국 독립군 부대들은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피해 규모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사망 36명, 포로 864명, 실종 59명이라는 자료도 있고, 사망 272명, 익사 31명, 실종 250명, 포로 917명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이렇게 무장 해제된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유시를 탈출하고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자유시 참변은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 갈등이 빚어낸 사건으로 그 과정에서 만주 지역 한인 독립군의 무장 역량을 크게 손실시킨 일대 비극이었다.

▶ 관련자료

ㆍ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