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부
제목 | 참의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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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參議府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중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24년 남만주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직할대로 설립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자 한인 자치 기관.
[내용]
1922년 봄 대한 독립단⋅서로 군정서⋅보합단⋅광한단⋅광복군총영 등 남만주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은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고 대한 통군부 결성에 합의하였다. 이어 1922년 8월, 남만주의 더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여 대한 통의부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대한 통의부는 성립 초기부터 공화주의자와 복벽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였다. 결국 두 세력의 갈등은 무력 충돌과 복벽주의자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복벽주의자들이 1923년 2월 의군부(義軍府)를 창설하였고 분립된 이후에도 대한 통의부와 의군부 양자 사이의 대립과 내부 분열이 계속되자, 대한 통의부 의용군 제1⋅2⋅3중대를 중심으로 이를 비판하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1923년 8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 산하의 군사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이의 승인을 요청하기 위하여 백광운(白狂雲), 조능도(趙能道), 박응백(朴應伯) 등 대표 5인을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파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얻은 후 1924년 5월, 그들은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비판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대한 통의부를 탈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대로서 참의부를 조직하였다. 의용군 5중대도 이에 합류하였다.
참의부는 광복군 사령부 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라 하였고, 남만주 지역의 군사와 민정을 통할하는 자치 정부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창립 당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은 백광운, 제2중대장은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은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은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은 김창천(金蒼天), 중앙회의의장은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은 김소하(金筱廈)가 맡았다. 참의부의 관할 구역은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관전(寬甸), 환인(桓仁), 통화(通化),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유화(柳化) 지역으로, 지역민은 15,000호 이상이었다. 1925년 8월부터는 위원제도를 채택하여 부서를 갖추고, 부서의 사무를 분할하여 자치 행정을 담당하였고, 50명 이상의 보호대원을 육성하여 각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부민들은 의무금 10원을 매년 납부하였다.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무장을 갖추고 산업 진흥과 교육을 위한 행정을 실시하였다.
참의부의 군사 편제는 5개 중대와 1개 독립 소대로 편성되었는데, 설치 초기에 군사력은 500명 이상이었고, 1928년 7월까지도 600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관할 지역 내에 군역 의무제를 실시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재향 군인단이 농촌 청년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 참의부는 주로 국내 진격 작전을 펼쳐 평안도 지방의 경찰 주재소나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는 정의부⋅참의부⋅신민부가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1926년 7월 중국 국민정부의 북벌을 계기로 중국 관내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安昌浩)의 만주 방문을 전후로 만주에서도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 통합의 방향과 내용을 두고 이견과 분열이 일어났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관으로 3부 통합 회의가 개최되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11월에 회의가 중단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참의부 내의 조직 분열이 발생하였고, 참의부 다수파는 참의부의 해산을 선언하고 1928년 12월에 정의부의 탈퇴파 및 신민부의 군정파와 연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혁신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참의부의 잔류파는 심용준(沈龍俊)을 중심으로 정의부 다수파 및 신민부 민정파와 연계하여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로 합류하였다.
▶ 관련자료
- ㆍ참의부(參議府)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