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전문학교
제목 | 보성 전문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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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普成專門學校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대한제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05년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이 설립한 사립 전문 학교로서 고려대학교의 전신.
[내용]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대신인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이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1905년 5월 사립 보성 전문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법률학과 이재학(理財學) 2개 전문과를 둔 2년제 전문학교였다. 교사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했다. 초대 교장은 신해영(申海永)이었다. 1907년 1월 수업 연한을 3년으로 늘렸으며, 이재과는 학과명을 경제과로 바꾸었다. 같은 해 52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해에는 졸업생과 직원을 아울러 보전교우회를 만들고 기관지 『법정학계』를 발행하기도 했다.
창립자 이용익은 1905년 9월 망명을 가서 1907년 2월 연해주에서 사망했다. 그의 손자인 2대 이사장 이종호(李鍾浩)는 비밀 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했다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국내 배후 인물로 연루되어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 과정에서 보성 전문은 운영난을 겪다가 12월 천도교 측에서 인수했다.
강점 이후 일제는 사립 학교를 억압했고, 1915년 「전문학교 규칙」에 따라 보성 전문은 사립 보성 법률 상업 학교로 격하되었다. 1919년 3⋅1 운동 과정에서 교장 윤익선(尹益善)과 실질적인 운영자였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투옥되면서 학교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위기에 대응해 일반 유지가 기부한 총 43만 3천 원의 기본 재산으로 1921년 12월 총독부로부터 재단 법인 인가를 받았다. 1922년 4월에는 재단 법인 보성 전문학교로 새롭게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송현동으로 교사를 이전했다.
이후 고원훈(高元勳) 교장에 대한 친일 문제로 재단 내 분규가 일어나고,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재정난을 겪던 중 1932년 3월 보성 전문은 중앙학원에 인수되면서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주도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는 원래 독자적으로 ‘한양 전문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고등 교육에 열의가 있었다. 1929년 재단 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한 뒤 보성 전문을 인수했다. 보성 전문은 1934년 안암동 현재 부지로 이전했다. 김성수가 인수한 후 보성 전문에는 유진오와 최용달, 현상윤 등 교수진이 대폭 확충되면서 경성 제국 대학의 관학풍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법과와 상과에 농과와 임과(林科)를 신설하여 종합 대학으로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1943년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이 시행되면서 1944년 4월에는 일제의 강요로 경성 척식 경제 전문학교(京城拓殖經濟專門學校)의 이과계 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때 법과와 상과를 대신하여 척식과와 경제과가 설치되었다. 해방 후 1945년 9월 보성 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했다. 1946년에는 종합 대학인 고려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