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제목 | 어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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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어린이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23년 3월 경성에서 창간된 월간 아동 잡지.
[내용]
1921년 4월 조직된 천도교 소년회는 장차 조선의 운명을 이끌어갈 주체로서 소년을 상정하고, 소년의 지⋅덕⋅체 발달을 위하여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1923년 3월 개벽사(開闢社)에서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창간 초기에는 대체로 한 달에 2회 정도로 발행되다가 곧 월간 잡지로 정착하였다. 1934년 7월 폐간될 때까지 총 122호가 발간되었으며, 해방 이후 1948년 5월 123호로 복간되어 1949년 12월 통권 137호까지 지속되었다.
천도교 소년회의 ‘새싹회’ 회원들이 발간을 주관하였고, 중심 인물은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었다. 발간 초기에는 방정환이 일본에 있었던 관계로 1~30호까지 발행인은 김옥빈(金玉斌)이었고 이후 31호부터 82호까지는 방정환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31년 방정환 사후 87호(1931. 8.)부터는 이정호(李定鎬)가 방정환의 역할을 이어받았다. 신형철(申瑩澈), 윤석중(尹石重) 등도 편집에 참여하였다.
『어린이』는 동요와 동화, 동극(童劇) 등의 구분을 확실히 하여 장르 의식을 확립했다. 또한 최초로 동요와 동화의 창작품을 게재한 점에서 한국 아동 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것으로 평가된다. 근대적인 창작 동화를 다수 수록하여 근대 동화의 기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고, 여러 작가의 창작 동요를 ‘동요란’에 게재하여 한국 근대 동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윤극영(尹克榮)의 「반달」, 유지영(柳志永)의 「고드름」, 이원수(李元壽)의 「고향의 봄」, 윤석중(尹石重)의 「오뚜기」 등이 대표적이며 이 곡들은 현재까지 애창되고 있다. 이 잡지를 통해 우수한 아동문학가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마해송(馬海松)과 정인섭(鄭寅燮), 한정동(韓晶東) 등이 대표적이며, 독자투고란을 통해서는 윤석중과 이원수, 박목월(朴木月), 서덕출(徐德出) 등이 알려졌다. 이 밖에 이 잡지가 발간되고 유통됨으로써 ‘어린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는 데도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