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혁명당
제목 | 조선 혁명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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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朝鮮革命黨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중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29년 만주에서 자치 기관인 국민부와 무장 단체인 조선 혁명군을 지도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단체.
[내용]
1927년 민족 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도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3부 통합이 추진되었지만, 각 부의 내부 갈등과 통합에 대한 입장 차이로 3부 통합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퇴파는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1928년 12월에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대해 정의부 다수파,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잔존파는 1929년 4월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1929년 9월 20일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가 열려 조선 혁명당의 조직을 결정하였다. 조선 혁명당은 이당치국(以堂治國)의 원칙에 따라 민족 유일당으로서 혁명 사업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조선 혁명당은 남만주의 한인 사회를 관리하는 자치 정부 국민부(國民府)와 군사 조직인 조선 혁명군을 지도하였다. 조선 혁명당의 위원장에는 현익철(玄益哲)이 선출되었다. 조선 혁명당은 남만주 지역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정치사상을 전하기 위한 잡지와 출판물 등을 발행하고, 재만 한인 청년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31년 8월 조선 혁명당 위원장 현익철이 일제에 체포되고, 1931년 9월 일제의 전면적 만주 침략(滿州侵略)과 이에 따라 ‘만주국’의 수립되면서 조선 혁명당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조선 혁명당은 1932년 1월 신빈현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최동오(崔東旿)를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는 더 이상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국 관내로 이동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이호원(李浩源), 김보안(金輔安) 등 소장파는 계속적으로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되던 1932년 1월 20일경 일제가 회의 장소를 급습하여 이호원, 김보원 등 9명을 체포하였다. 탄압은 2월까지 계속되어 60여 명이 체포되었고, 80여 명이 순국하였다. 조선 혁명당은 지도부를 전면 개편하여 당 중앙집행위원장에 고이허(高而虛),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에 김동산,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에 양세봉(梁世奉)을 선출하였다.
만주국 수립 이후 일제가 독립운동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재만 한인 사회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면서 한인 자치 기관으로서의 국민부가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1934년 11월에 열린 군민 대표 대회에서는 국민부와 조선 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 혁명군 정부(朝鮮革命軍政府)를 결성하였다. 조선 혁명군 정부는 1935~1936년경이 되면 국제적인 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보았고, 이때를 기회로 획기적인 재건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1935년 7월 유광호를 서울에 파견하여 선내공작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모두 27차례나 국내에 조직원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936년 10월에는 윤영배를 국내로 파견하여 대중적인 노동자 농민 조직 결성을 시도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 혁명당은 중국 관내의 활동과 연계하기 위하여 최동오와 김학규(金學奎) 등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관내 운동 세력을 결집하여 만주에서의 실질적인 투쟁을 지원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관내 민족 운동 정당들을 망라한 민족 혁명당(民族革命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결성된 민족 혁명당에서 조선 혁명당의 최동오, 김학규, 김활석(金活石)이 중앙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조선 혁명당은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면서 해소 선언을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