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두장
제목 | 미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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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米豆場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
유의어 |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
별칭•이칭 |
[정의]
쌀⋅콩 등 곡물을 대상으로 현물 및 선물(先物) 거래하던 시장.
[내용]
개항 이후 조선에서 생산된 미곡 중 상당량이 일본으로 이출(移出)되었다. 따라서 생산과 집하, 정미(精米), 보관 등의 과정을 합리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했다. 이를 매개하는 경제 기관이 미두장, 곧 미두취인소였다. 취인소(取引所)의 당초 목적은 미곡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 미곡 수집상에 대한 정확한 미곡 가격의 동향 전달 등을 통해 구매 과정을 합리적으로 만들고 무역에 도움이 되는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두취인소가 처음 등장한 곳은 1896년 인천이었다. 당시 일본 상인들이 발의해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했다. 이후 부산과 목포, 군산 등 주요 미곡항에 곡물 현물 시장 및 취인소가 들어섰다.
그런데 미두장에서는 현물도 거래되었지만, 선물 거래가 대부분이었다. 곡물은 생산 시기가 한정되어 있고, 자연재해나 전쟁에 따른 변동이 있지만, 소비 시기는 상시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가격 변동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가격 변동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고 곡물 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로 선물 거래 형태로 거래되었다. 이때 특정 기일에 거래한 당사자 사이에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위험을 방지하고, 거래 당사자를 알맞은 시기에 확보할 수 없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중개 역할을 하는 ‘결제소’가 필요해진다. 결제소에서는 매일의 선물 가격 변동에 따라 발생하는 거래자 사이의 이득과 손실을 정산한다. 이어서 정산 결과를 손해를 본 거래자의 계좌에서 이익을 본 거래자의 계좌로 입금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정산을 위해서 결제소는 선물 계약을 하려는 거래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증거금을 예치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선물 거래는 현물 없이도 일정한 액수를 투자해 현물을 주고받는 권리를 확보하고, 이로써 현물 시세 변동에 따른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위였다.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산미 증식 계획이 시작되자 조선의 미곡 시장은 활황 국면을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 광풍이 조선에 불었다. 투기 열풍에 많은 자본을 가진 투자자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학생, 상인, 지주와 머슴,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서민들까지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꿨지만 선물 거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투기 열풍은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려웠던 한국인들이 현실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심리가 투영된 것이기도 했다.
조선의 미두 투기 열풍은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통제 경제를 추구하면서 미곡의 자유 거래를 금지하자 미두 열풍도 사라졌다. 1939년 미곡 시장이 모두 폐쇄되고,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조선미곡시장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이 회사가 전시 미곡 유통을 대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