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부민관
제목 | 경성부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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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京城府民館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30년 중반 이후 경성의 각종 문화 예술 공연이 진행되었던 경성부 부설 강당.
[내용]
경성부민관은 1935년 12월 10일 경성의 부립(府立) 강당으로 설립되었다. 부지 면적 1,780평, 연평면적 1,717평의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었다. 수용 인원은 고정석 1,800명이고, 보조 의자와 입석을 합치면 3,000명까지도 가능한 규모였다. 경성이 1930년대에 이르러 인구가 40만 명에 육박하고 일본제국의 7대 대도시로 성장하자, 경성의 규모에 어울리는 문화 시설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부민관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지배 관계에 따른 갈등, 계층 사이의 대립, 그리고 민족 간 차별 등으로 분열이 깊어지자, 경성을 문화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고안된 계획이었다.
부민관은 대관제로 운영되었고 연극, 영화, 음악, 무용을 포함한 각 문화 예술 단체들에 의해 널리 활용되며 경성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공연만이 아니라 총회, 강연회, 표창식, 사교 모임, 결혼식, 애도식 등 경성의 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한 여러 행사까지 수용하면서 부민관은 공공 강당으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부민관은 시민의 문화 공간이자 공공시설에서 전시 동원과 선전을 위한 무대로 탈바꿈하였다. 부민관은 ‘시국대응(時局對應)’, ‘보국(報國)’ 등 전쟁과 동원의 구호가 가득한 각종 회합과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강당을 통한 직접적 선전은 신문보다 더 생생하게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부민관이 전시 선전의 중요한 장소로 탈바꿈하자, 이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였다. 대한애국청년단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은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전시 선전과 동원을 위한 ‘아시아 민족 분격 대회’가 개최되자, 부민관에 사제 폭탄을 터트리며 일제의 전시 선전과 식민 통치에 저항하였다.
해방 후 경성부민관은 다른 사설 극장과 마찬가지로 미 군정에 귀속되었다. 이후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 등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서울특별시의회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관련자료
- ㆍ부민관(府民館)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대중과 함께 울고 웃은 신파극-「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