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
제목 | 관동군 |
---|---|
한자명 | 關東軍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일본, 중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러일 전쟁 후 190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 주력부대의 하나.
[내용]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조차지인 요동반도(遼東半島, 랴오둥 반도)를 인수하고 창춘(長春)에서 다롄(大連)에 이르는 남만주 철로를 할양받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요동반도 일대를 관동주(關東州)라 부르고 1906년 통치 기구로 관동도독부(1919년 이후 관동청)를 두었다. 남만주 철도(만철) 주변 부속지 수비를 임명받은 것이 바로 관동군의 시초이다. 포츠머스 조약의 추가 약관에 따라 일본은 만철 연선에 1㎞당 15명, 총 14,419명의 수비병을 둘 수 있었다. 수비대는 1919년 4월에 관동군 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여기에 흡수되었다. 사령부가 신설됨으로써 행정 기관인 관동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 육군의 지휘를 받았다. 사령부 본부의 위치는 뤼순(旅順)이었다.
관동군은 일제의 중국 침략과 소련 견제의 전위부대였다. 관동군은 1928년 장쭤린(張作林) 폭살 사건,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만주국 건설 과정에서 첨병이 되었다.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의 군사와 정치⋅행정을 이면에서 통제하며 실권을 쥐고 있었다. 당시 관동군 사령관은 일본 주만대사(駐滿大使), 관동장관을 겸직했다. 또한 일본의 가상 적국이었던 소련을 침공하기 위한 준비를 도맡은 부대도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소련에 대하여 1938년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 1938년 노몬한 사건(Nomonhan事件) 등 군사 도발을 계속했다. 1941년 독⋅소 개전 이후에도 소련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이어졌다. 대륙 침략의 확대와 대소전쟁(對蘇戰爭) 준비 과정에서 관동군의 병력은 계속 증강되었다. 1933년 10만 명 정도였던 병력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소 개전 무렵에는 대소전쟁 준비로 약 100만 명에 달하였고, 일본 육군의 주력이 되었다.
관동군은 또한 만주 일대의 중국과 한국인 항일 무장 투쟁 세력에 대한 탄압에도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 대일 선전 포고와 함께 출진한 소련군의 공격으로 관동군은 급속히 괴멸되었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관동군은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