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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

제목 남한 대토벌 작전
한자명 南韓大討伐作戰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의병 부대와 한국인을 학살한 작전.

[내용]

1907년 정미의병의 봉기를 기점으로 의병의 반일 투쟁이 더욱 가열화되고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1909년 7월 4일 한국 강제 병합에 관한 기본 방침을 결정한 일제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진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일제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서부를 포괄하는 남한 지역을 대상으로 소위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역은 한국 제일의 곡창 지대이면서 동시에 의병 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의병을 진압하고자 했다. 또 일본군의 위력을 보여 주어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겪었던 수모를 갚고 명예를 회복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일본군은 임시 파견대 2개 연대와 헌병, 경찰을 투입하고, 해상으로는 수뢰정 4척을 배치하였다. 작전 기간은 9월 1일부터 40일로 책정하고 3단계에 걸쳐 작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후 10월 30일까지 기간을 연장하였다. 일본군은 마을 간의 왕래를 차단하고, 한 마을을 적게는 2회에서 많게는 10여 회를 반복 수색하며 토벌에 나섰다. 총 2개월간에 걸친 일본군의 학살로 인해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일대는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으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103명의 의병장과 4천여 명의 의병들이 체포, 피살되었다.

일본군의 의병 학살 이후 황해도, 경상북도, 강원도 등 산간 지역에서 소규모 의병 활동이 이어졌으나 사실상 국내에서 의병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일부 의병 부대는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간도, 연해주 등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서 무장 항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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