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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 청년당

제목 신한 청년당
한자명 新韓靑年黨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창립된 한인 청년들의 항일 민족운동 단체.

[내용]

1912년 7월 신규식(申圭植) 등이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 동제사(同濟社)가 모체가 되었다.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14개조 원칙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민족 자결’의 원칙을 제시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이를 약소민족의 독립 기회로 삼으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18년 여름부터 동제사의 소장회원들과 상하이에 있던 청년 민족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파리 강화 회의 개최가 예고되자, 이를 한국 독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우선 독립운동을 주도할 청년 조직으로 11월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결성 당시 대표는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었으며, 조동호(趙東祜), 장덕수(張德秀),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서병호(徐丙浩),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이 참가하였다. 이후 3⋅1 운동을 지나면서 당원 규모는 150명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신한 청년당은 1918년 11월 28일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또한 마침 상하이에 온 윌슨의 특사 크레인(Charles Crane)에게 부탁하여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도 이를 전달했다. 1919년 1월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신한청년단은 여운형을 노령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파견하여 파리 대표 파견 소식을 알렸고, 이는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과 국내의 3⋅1 운동 추진에 큰 자극을 주었다.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신한 청년당은 상하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는데, 독립임시사무소를 거점으로 일본과 만주, 미국 등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집결했다. 신한청년단 당원들은 4월부터 임시 정부 수립 논의가 시작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임시 정부의 실무진으로 활약했다.

신한 청년당은 독립의 완성, 정신적 민족 개조, 학술과 산업의 발전을 통한 민족의 실력 양성과 신문화에 의한 전 인류에 대한 기여 등을 표방했다. 강령으로는 대한 독립과 사회 개조의 실행, 세계대동의 촉성을 내걸었다. 1920년 3월 1일 기관지 『신한청년』을 창간하여 국내외로 보급하였다. 그러나 신한 청년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활동은 소득 없이 끝났다. 또 1921년 미국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의 외교 독립운동도 실패로 끝났다. 신한 청년당은 상하이에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 원동지부가 조직되고 여기에 신한 청년당원들이 다수 가입하면서 당세가 약해졌다. 여운형을 비롯한 핵심 세력 일부가 사회주의 그룹에 가담하면서 당원 내부의 이념 갈등도 확산되었다. 국내외 민족 운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되어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편을 위한 국민 대표 회의가 별 성과 없이 끝나면서 국외 민족 운동이 분열되어가자, 신한 청년당도 1923년 6월 당 회의 끝에 해산을 결정하였다.

▶ 관련자료

ㆍ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