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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동 총동맹

제목 조선 노동 총동맹
한자명 朝鮮勞動總同盟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7년 노동 운동의 전국적 연합체로서 결성된 노동 운동 단체.

[내용]

1919년 3⋅1 운동 이후 노동자가 양적으로 점차 증가하면서 노동 운동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면서 노동 운동도 본격적으로 전국적 연계망을 갖고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조선 노농 총동맹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포괄하는 전국적 조직으로 각종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조건과 이해관계를 갖는 노동자와 농민을 단일한 조직으로 묶어 운동을 전개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의 성장에 따라 분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5년 11월 제6차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의 분리를 결정하였지만, 일제가 전국대회를 허가하지 않아 바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 노농 총동맹은 서면대회 형식으로 두 단체의 분립과 임원 선거를 진행하였다.

1927년 9월 7일에 열린 선거위원회를 통해 조선 노동 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에는 이낙영(李樂永), 중앙집행위원에 권숙범(權肅範), 김경식(金暻植), 김종건(金鍾健), 남윤구(南潤九), 도정호(都正浩), 박경호(朴慶鎬), 송주상(宋柱祥), 오영(吳英), 이병의(李丙儀), 이수을(李秀乙), 임표(林豹), 장기욱(張基郁), 차금봉(車今奉) 등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조선 노동 총동맹이 결성된 이후에도 일제는 전국 단위 대회를 계속 불허하였기 때문에 제1회 중앙위원회도 1927년 12월 15일에 서면으로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중앙상무위원에 권숙범(쟁의 겸 공제부장), 도정호(조직 겸 부인부장), 박경호(조사부장), 오영(재정부장), 이병의(정치부장 겸 교육출판부장)를 선출하였다.

어렵게 조직되었지만 조선 노동 총동맹은 노동 운동의 성장에 따라 1928년 말을 기준으로 가맹단체가 150개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 노동 총동맹의 집회를 대부분 금지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낙영, 이병의, 도정호 등 조선 노동 총동맹의 주요 간부들이 1928년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및 투옥되면서 조선 노동 총동맹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조선 노동 총동맹은 1929년 7월 24일에 중앙위원회 간담회를 열고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검사위원을 보충하여 새로운 진영을 구축하였다. 중앙집행위원에는 기존의 김종건, 남윤구, 이수을 등 7명에 새롭게 김원식(金元植), 김섬(金暹), 차주상(車周相), 채규항(蔡奎恒) 등 16명이 추가로 선출되었다. 새롭게 인원을 보충하였지만 조선 노동 총동맹의 중앙 활동은 여전히 지지부진하였다. 1929년 9월 일본이 일본 내의 한국인 노동자를 한국으로 송환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일본 정부에 전문으로 항의를 하고, 1930년 1월 부산 조선 방직 회사 파업 시 격려문을 보내기도 했지만, 세계 대공황의 여파 속에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노동 운동과 파업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다. 이렇게 활동이 부진한 것은 일제가 조선 노동 총동맹의 거의 모든 활동을 금지하고 탄압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혁명적 노동 운동으로 전환하면서 조선 노동 총동맹 해소 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조선 노동 총동맹과 산하 노동 조직과의 조직적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점차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 관련자료

ㆍ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