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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학회

제목 서우학회
한자명 西友學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06년 10월 관서 지역 출신 지식인과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계몽 운동 단체.

[내용]

서우 학회는 박은식(朴殷植), 김병희(金秉熹), 신석하(申錫廈), 장응량(張應亮), 김명준(金明濬), 김유탁(金有鐸) 등 12명의 발기인과 정운복(鄭雲復), 이갑(李甲), 노백린(盧伯麟), 안병찬(安秉瓚), 유동작(柳東作), 유동설(柳東說), 이달원(李達元) 등이 중심 인물로 참여하여 설립한 계몽 운동 단체이다. 1906년 10월 26일 개최된 임시 총회에서 회장 정운복, 부회장 김명준, 평의원 유동설, 유동작, 김달하(金達河), 안병찬 등을 선출했다.

학회의 설립 취지와 주요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교육,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우 학회는 학회지 발간, 학교 설립, 사립 학교의 교육 방침 지도, 유학생 지도,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등의 방법으로 교육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학회지인 『서우(西友)』에는 신사상을 소개하고 신교육과 학교 설립의 필요성 등 실력 양성과 교육 계몽을 위한 논설들이 게재되었다. 또 신교육 실시를 위해서는 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사범 학교인 서우 학교(西友學校)를 설립, 운영하였다. 또 각 지역에 학교 설립을 촉구하고, 설립된 학교들의 운영을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서우 학회는 서울에 중앙회를 두었고, 각 도에 지방 권유위원을 파견하여 회원을 모집하여 지방 사무소와 지회를 설치했다. 지방 사무소와 지회가 설치된 곳은 구성군, 강서군, 평양군, 운산, 곽산, 자산, 영변, 평산, 은산, 삭주, 강동, 개성, 강화, 정주 등 25개 이상의 지역이었다.

서우 학회는 1907년 3월에 설립된 청년 운동 단체인 서북학생친목회(西北學生親睦會)를 통해 함경도 출신이 중심인 한북 흥학회(漢北興學會)와 공동으로 연설회, 강연회, 토론회, 운동회 등을 개최하는 등 유대 관계를 유지하여 갔다. 1908년 1월에 이르러 두 학회는 서북 학회(西北學會)로 통합되었고, 각각 운영해 왔던 서우 학교와 한북 의숙 역시 통합되어 서북 협성 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되었다.

▶ 관련자료

ㆍ서우 학회(西友學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