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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

제목 이승휴
한자명 李承休
유형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224~1300, 고려 후기의 문신.

[내용]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加利) 이씨(李氏)의 시조이다. 1252년(고종 39)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다음 해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三陟縣)에 갔다가 마침 몽골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두타산(頭陀山)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3년(원종 4)에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 등에게 관직을 청원하는 시를 보내, 다음 해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가 되었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가 봉기했을 때 삼별초에게 붙잡혔다가 탈출하였다. 조정에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다면서도 군수 물자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은 채 멋대로 물자를 거두고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이 괴로워하므로, 그 폐해를 강력하게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1273년(원종 14)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元)나라에 가서 뛰어난 문장력으로 중국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다음 해에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 번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대에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 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양광충청도 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처벌하였다가 원한을 사서 곧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고, 이때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殿中侍史)에 임명되었으나 1280년(충렬왕 6) 대간(臺諫)과 함께 국왕의 실정과 측근의 문제 등을 10개 조로 간언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이에 구동의 옛 은거지로 돌아가 살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지었다. 1298년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이 즉위해 개혁 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었으나 나이가 많음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였고, 결국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저술로는 문집인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과 『제왕운기』, 『내전록』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제왕운기』는 중국과 고려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 단군 신화를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저술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큰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같은 시기에 저술한 『내전록』은 책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4권으로 구성된 『동안거사집』에는 저자가 1273년(원종 14)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의 경험을 시로 읊은 「빈왕록(賓王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행록(使行錄)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관련자료

ㆍ이승휴(李承休)
ㆍ동안거사(動安居士)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