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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제목 향교
한자명 鄕校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향학(鄕學), 교궁(校宮)
별칭•이칭

[정의]

유학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치한 관립 교육 기관.

[내용]

조선은 교육을 통해 유교 이념을 확산시키고 통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조선 시대의 교육 기관은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구분되는데, 관학에는 서울의 성균관(成均館)과 4부 학당(四部學堂), 지방의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원(書院)⋅서당(書堂)⋅서재(書齋)가 있었다.

향교가 지배 이념인 유학을 향촌 사회에 보급하여 백성을 교화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면 전국 대부분의 군현에 설립되어 그 수가 329개에 달했다. 향교마다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향교 운영의 재원으로 삼게 하고, 교관(敎官)을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교생(校生)에게는 군역을 면제하는 특권을 주었다. 향교의 운영은 그 고을의 수령(守令)이 맡았기 때문에 대부분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官衙)와 가까이 있었다. 향교는 크게 문묘(文廟)와 학교의 두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그 사이에 담을 쌓아 구분하였다. 문묘에는 중앙에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양 옆으로는 선현(先賢)들의 위패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었다. 학교의 중앙에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두고, 학생들이 기숙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좌우에 설치하였다.

향교의 입학 정원은 고을의 위상과 크기에 따라 차이가 났는데,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의 경우는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군(郡)은 50명, 현(縣)은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교생은 소학(小學)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주로 배웠는데, 배운 내용에 대하여 매일[일강(日講)], 매월[월과(月課)], 매년[도회(都會)]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받았다.

조선 후기에는 각 지방에 서원이 건립되는 등 사학이 발달하면서 향교가 가진 교육적 기능은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향교에 소속되는 것은 양반 신분을 보증해 주고 군역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으므로, 유생들은 향교에 소속되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향교의 제향 기능은 지속적으로 유지됨에 따라 향교는 서원과 더불어 해당 지역 사족들의 결집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 관련자료

ㆍ향교(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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