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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총파업

제목 원산 총파업
한자명 元山總罷業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원산 노동자 총파업(元山勞動者總罷業)
별칭•이칭

[정의]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원산(元山)에서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전개한 일제 강점하 최대의 총파업.

[내용]

1921년 3월 원산의 노동조합으로서 원산 노동회가 출범했다. 원산 노동회는 고용주별로 조직되어 그 아래 일꾼들을 감독하는 십장(什長)이 지배하는 체계로 출발했다. 1924년 6월 원산 노동회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노동 계급의 해방과 무산 계급의 세계적 제휴, 노동자의 지식과 생활 향상을 새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후 원산 노동회는 1925년 10월 20일 조직을 직업과 장소에 따른 직업별 7개 노동조합으로 재조직하고 원산 노동 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그 규모는 2,200여 명으로 원산의 노동자를 거의 포괄하였다. 이후 연합회는 여러 지역의 운동 단체와 연합하여 노동자의 일상적인 이익 획득을 위해 투쟁하고, 노동자의 교양과 계급 의식 강화에 노력했다.

원산 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 회사 제유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조선인 차별이 심했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하자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노동자들의 강한 저항에 회사 측은 폭행 감독 축출, 파업 중 임금 4할 지급 및 새로운 임금 협상 등을 약속했다. 파업 과정에서 문평 제유 공장 노동자들은 ‘문평 제유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연합회에도 가맹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회사 측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929년 1월 13일 문평 제유 공장 노동조합의 보고를 받은 연합회는 최저 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감독관 파면, 단체 계약권 확립 등을 요구하며 부분 총파업을 선언했다. 연합회는 문평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 부두 노동자들에게 문평 제유의 화물을 일체 취급하지 말도록 했고, 연합회의 전 조합원은 금주를 통해 매일 1인당 5전씩 걷어 파업 자금을 충당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1월 14일 문평 제유 노동조합과 문평 운송 노동조합이 파업을 단행했다.

원산의 자본가들은 노동 운동을 주도해온 연합회를 파괴하려던 차였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연합회 소속 노동자를 일체 고용하지 않겠다고 했고, 원산의 운수 회사에서는 문평 석유 회사 화물을 취급하지 않는다며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원산상업회의소는 인천과 중국 등으로 인부 모집대를 파견했다. 이러한 조치에 연합회는 1월 22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23일 정식으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총파업에는 연합회 산하 24개 노조의 노동자 2,200여 명이 가담하였다. 일제 당국은 결국 경찰을 동원해 파업 간부를 검거하는 등 파업 파괴에 나섰다. 현지 일본인 재향군인회와 국수회(國粹會), 소방단 등은 테러 단체를 조직해 경찰과 함께 노동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했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어용 노동 단체 설립 자금을 마련해 폭력배를 모아서 함남 노동회라는 어용 노동 단체를 조직했다.

파업 기간에 국내와 일본, 중국 등지의 여러 노동 단체와 개인들이 동정금을 모으고 격려문을 발송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총파업 지원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3월이 되어도 파업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원산상업회의소는 함남 노동회에 가입하면 취업시키겠다고 회유했고, 노동자들 사이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연합회 지도부는 강령을 개정함과 동시에 강경 투쟁을 주장하던 간부들을 모두 교체하였다. 4월 1일과 3일 파업 노동자들 일부가 함남 노동회 간부와 회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폭력 투쟁과 최후의 총 투쟁을 두고 노동자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연합회는 4월 8일 파업을 종결했다. 노동자들은 각 단체별로 자유 취업을 해야 했지만, 자본가 측은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그 뒤 연합회 소속 노동자 일부는 부득이하게 연합회를 탈퇴하고 함남 노동회에 가입했으며, 상당수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4월 21일에는 연합회 사무실이 폐쇄되면서 총파업은 노동자 측의 패배로 끝났다.

▶ 관련자료

ㆍ원산 노동차 총파업(元山勞働者總罷業)
ㆍ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