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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대표 회의

제목 국민 대표 회의
한자명 國民代表會議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3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재편을 통해 독립운동의 활로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회의.

[내용]

1919년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가 상정되지 않으면서 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 모색이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수립 직후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해 국내에 구축했던 기반들이 와해되고, 미주 지역의 지원도 미주 사회의 분열에 따라 크게 줄어들면서 존립에 위기가 닥쳤다. 그리고 ‘기호파’와 ‘서북파’의 갈등과 대립도 심화되어 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파 중심의 독선적 운영으로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1921년 1월 이동휘 국무총리가 사임하고, 4월 김규식, 5월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국무위원을 잇달아 사임하면서 임시 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1921년 2월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김창숙, 원세훈 등 14명이 임시 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면서 국외 각지의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참가하는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만주의 독립군 세력을 비롯해서 임시 정부 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어갔다. 그 결과 임시 정부 수립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했던 안창호가 5월, 임시 정부 노동국 총판을 사임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주장하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6월 안창호 주도로 국민 대표 회의 상하이 기성회가 개최되었고, 베이징, 톈진, 난징, 하와이 등지에서 ‘국민 대표회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21년 8월 연합 조직으로서 상하이에서 ‘국민 대표회 주비 위원회’가 조직되어 9월 국민 대표 회의의 개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의는 11월 미국에서 개최 예정인 워싱턴 회의의 대표단 파견과 이에 대한 기대, 개최 경비 문제 등으로 무기 연기되었다. 워싱턴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후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1922년 1월 개최된 극동 민족 대회에 참가한 관계로 다시 연기되었다. 1922년 4월 안창호는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연설회를 다시 개최했고, 임시 정부 의정원은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청하는 인민 청원서를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5월 국민 대표회 주비 위원회가 대회 소집을 선언했지만, 대회 개최 자금 문제 등으로 회의 개최가 지연되다가 1923년 1월에 이르러서야 회의가 개최될 수 있었다.

국민 대표 회의는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상하이에서 열렸으며, 총 74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다. 국내와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 지역 대표 125명이 국민 대표 회의에 참여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에서 임시 정부 개조안(改造案)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해 회의에 참여한 세력들은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나뉘어서 대립하였다.

개조파에는 안창호가 지도하는 흥사단 계열 등 서북파 민족주의 세력, 서간도 지역의 김동삼 등 서로 군정서 세력, 김철수를 비롯한 상해파 고려 공산당 세력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임시 정부의 각종 제도와 명칭 등을 변경하여 임시 정부를 민족 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개조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창조파에는 신채호 등 북경군사통일회, 문창범, 원세훈 등 대한 국민 의회 세력, 김만겸, 한명세를 비롯한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 세력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거의 모든 민족 운동 단체가 참여하고 최고의 권위를 가진 국민 대표 회의에서 임시 정부를 대신할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도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국민 대표 회의를 부정하였고, 임시 정부를 그대로 옹호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대립이 전개되면서 국민 대표 회의는 많은 회의를 거쳤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표류하였다. 개조파가 회의장을 떠나는 가운데 창조파가 독자적으로 신정부 수립을 기도하였지만 이는 큰 반발을 초래했다. 임정 옹호파가 창조파 정부에 해산을 명령하고 활동을 봉쇄하면서 국민 대표 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종료되게 된다. 국민 대표 회의의 결렬로 국외 민족 운동은 사분오열의 위기에 빠졌으며,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나면서 임시 정부는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