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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군정서

제목 서로 군정서
한자명 西路軍政署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9년 서간도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결되어 결성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

[내용]

서로 군정서는 서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조성된 독립운동의 역량이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결집되어 조직된 단체였다. 1919년 4월경 서간도 지역 한인들의 통합적 자치 기구인 한족회(韓族會)가 설립되었다. 한족회는 기존에 존재하던 자치 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이 확대 개편한 것으로 부민단이 중심이 되어 자신계⋅교육회 등을 통합하고, 유하현, 통화현, 환인현, 집안현, 임강현, 해룡현, 흥경현 등의 한국인 주민 1만여 호를 토대로 조직되었다.

한족회는 중앙 기관을 삼원포에 두었으며,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치안, 재무, 사법, 행정 등을 담당하였다. 한족회의 책임자는 이탁(李鐸, 1889~1930)으로 김동삼, 김형식, 지상주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족회는 부민단과 마찬가지로 1,000호마다 총관을, 100호마다 백가장을, 10호마다 십실장을 두어 지방 조직을 관리하였다. 이러한 한족회를 기반으로 일종의 임시 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 서로 군정부(西路軍政府)였다. 군정부는 이상룡이 총재를, 여준이 부총재를 맡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서간도 지역에 여운형을 파견하여 군정부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의 협의 결과, 군정부라는 명칭을 정부가 아닌 임시 정부 산하의 군사 자치 기관을 지칭하는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였고, 행정을 담당하는 한족회는 원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서로 군정서는 산하 기관으로 독판부, 정무청, 내무사, 법무사, 재무사, 학무사, 군무사, 참모부, 사령부, 서의회, 참모처, 군정분서를 두었다. 임원으로는 독판부 독판에 이상룡, 부독판에 여준, 정무청장에 이탁, 내무사장에 곽문, 군무사장에 양규열, 참모부장에 김동삼, 사령관에 지청천이 선출되었다.

서로 군정서는 독립 전쟁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금 문제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신흥 무관 학교와 연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외에도 국내로 진공하여 친일파 관료 또는 밀정을 제거하거나 주재소나 경찰서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20년 10월 일제는 만주 무장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 지역에 출병시키는 ‘간도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서로 군정서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본부를 북만주 지역의 액목현(額穆縣)으로 옮겼고, 백두산 기슭의 안도현(安圖縣)에 군사기지를 두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로 군정서의 기반이었던 한족회가 붕괴되고, 밀산을 거쳐 러시아령 자유시로 갔던 부대가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받고 돌아오게 되면서 서로 군정서의 활동도 침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 후 서로 군정서는 1922년 봄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단, 광한단 등과 협의하여 대한 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다른 기관과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여 1922년 8월 남만주 지역의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모여 ‘남만 한족 통일 회의’를 열고,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그렇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924년 11월 정의부 결성에 참여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 관련자료

ㆍ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ㆍ서로 군정서군(西路軍政署軍)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